[오후 한 詩]오래된 제사/박정남

슬프다는 것은말간 백지가 오는 것이다말간 술 한 잔막걸리 잔 하나가 불현듯내 앞에 놓이는 것이다구름덩이 같은 흰 술그 잔을 받아 비운 내가떠올라하늘 구름들 속에 섞이는 것이다멀리 보이는 물 담아 논논에 연두가 잠겨 있다그 논으로 구름들이 그러하듯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서나의 첫발을 담그고모포기를 심듯이 아주 담그고모포기를 심는 시늉을 하는 것은 물론못줄까지 대며 가지런히 모를 심는 것은내 흰 손이 기필코 이루어야 할오래된 제사 의식이다그 사람은나의 하나님사랑방 툇마루 앞에 선 배나무에배꽃이 피어날 즈음이면샘가 커다란 갈색의 고무 통에씨나락을 담궈 하얀 벼 싹을 내고그리고 당신과 나의 거울인 그 논들에발바닥 도장 찍듯 깊이 엎드리셨다
■좀 생뚱맞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시 쓰는 사람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시는 시 쓰기에 대한 시처럼 보인다. 특히 "말간 백지"라든지 "못 줄", "흰 손", "오래된 제사" 등의 어사들 때문이다. 물론 농부 혹은 농사에 대한 시일 수도 있고 슬픔에 대한 시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이 세상의 이런저런 슬픔들을 정성껏 다독이고 다스려 정갈한 논 같은 시 하나 장만하는 게 시인의 일이지 않나 싶어서 좀 한갓지게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농부만 한 시인도 달리 없겠다 싶다. 시인의 성심에 견주어 이 여름날 농부의 수고가 덜할 바 없으니 말이다.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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