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 슈퍼맨 아빠

산에 오르면 핑계가 많아진다. '그래, 나는 내리막 체질이야.' '평지에서는 내가 더 빠르지.' 오르막 산길에서 뒤에 있는 이들이 내 앞으로 추월하는 상황을 겪을 때마다 핑계를 떠올리곤 한다. 무엇인가 과학적인(?) 근거를 떠올리려 애쓴다. 내 몸무게와 배낭 무게, 어제 마신 소주의 양까지 분석해서 내가 뒤처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낸다. 하지만 아무리 핑계를 대려 해도 도저히 설명이 안 될 때가 있다. 바로 어린아이들에게 추월을 당할 때다. 까마득한 오르막길은 쳐다만 봐도 아찔하고 기운이 빠지게 마련이다. 발은 천근만근 무겁고, 얼굴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다. 눈앞에 평평한 바위만 보이면 앉고 싶고, 물을 마시며 쉬고 싶다. 그런데 아이들이 오르막에서 생기발랄한 얼굴로 땀도 별로 흘리지 않으며 나를 추월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대략 난감'이다.  난이도 최상의 설악산 '공룡능선' 종주까지 경험한 내가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추월을 당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부끄럽기도 하고, 왠지 씁쓸하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참 묘하다. 탄탄한 근육과는 거리가 먼 체형의 아이들이 오르막 산길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쭉쭉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얼마 전 초등학생 아들과 북한산 '족두리봉' 산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어떻게 쟤는 숨도 헐떡거리지 않지." 뒤에서 산을 오르던 40대 부부는 내 아들을 보며 자기들의 대화를 이어갔다. "아이는 가벼우니까 어른보다 힘이 들지 않을 거야."  숨을 헐떡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부인의 한 마디 물음에 그의 남편은 나름대로 근거를 내놓았다. '산에서 핑계를 대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어.' 그 부부의 대화를 엿들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하지만 내 처지가 누군가를 비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난달 가족과 함께 산에 올랐을 때 느꼈던 '쓰라린 경험'이 떠올랐다. 평소에 잘 놀아주지도 못하니 이번 기회에 점수를 따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여러 개의 물병과 각종 음식, 산악용 물품 등을 배낭에 잔뜩 짊어지고 북한산으로 향했다.  모처럼 '슈퍼맨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의욕이 넘쳤다. 선두에서 가족을 이끌고 열심히 산을 오르다 체력이 떨어질 무렵 인자한 목소리로 한마디 전했다. "우리 여기에서 쉬었다 갈까?" 무거운 배낭을 사실상 홀로 짊어지며 가족 등반대를 이끌다 보면 힘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체력이 소진됐음을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슈퍼맨 아빠의 위엄을 유지해야 하지 않은가. 아빠가 힘이 들어 쉬려는 게 아니라 가족을 위해 달콤한 휴식을 주려는 것이라는 '포장술'이 필요했다. 인자한 목소리로 동의를 구한 이유다. 하지만 아들의 한마디에 힘이 쭉 빠졌다. "아빠, 조금 더 올라가서 쉬어요."  휴식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 '초딩'은 이미 몇 발짝 앞서가고 있다. '앗! 이게 아닌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슈퍼맨 아빠의 눈물겨운 행군은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류정민 산업부 차장 jmryu@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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