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詩]골목의 다짐/이은규

   우리는 한 골목 입구에 도착했다 처음엔 나란히 옆모습을 보며 걸었다 골목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담쟁이 넝쿨의 웃음소리 골목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벽을 등지고 서로를 마주보며 걸었다 골목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문득 한 사람은 뒤돌아 골목을 빠져나갔고 한 사람은 남았다  기억 담쟁이 넝쿨만 무럭무럭, 세상의 모든 골목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구불구불하지만 그건 마치 황무지의 나무들이 바람의 방향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이는 이치, 이제 골목의 무수한 벽들을 깨 버리거나 훌쩍 뛰어넘거나 사실은 벽이 아니라고 믿거나 통과해 버리는 등의 묘기를 부리지 않겠다고 적는다 골목 끝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나아가기로  골목의 다짐, 남은 한 사람은 가만히 벽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으며 기나긴 문장들을 쓰기로 한다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나아가며 벽을 따라 걷는 슬픔으로 가득 차기로 파멸과 극복을 반복하는 영웅전집이나 경들을 타인의 일기장을 지우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멈추기로 한다 타오르는 문장들, 이제 일용할 양식은 매일 조금씩 갱신되는 슬픔  
 이 시는 시를 쓰는 어떤 자세에 관한 시처럼 보인다. 이런 시를 두고 메타시라고 부른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시인은 지금 이렇게 적고 있는 셈이다: 나는 남겨진 자로서 앞으로 그 슬픔에 대해 정직하게 쓰겠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왜 시인들은 시 쓰기에 대한 시를 쓰는 걸까? 무척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때 쓰기의 대상인 시란 일생을 두고 다다르고자 하나 결코 이르지 못할 그 무엇인 셈이다. 그것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완전한 단 한 권의 책과도 같다. 따라서 시 그것 자체는 쓰기의 대상일 수가 없다. 그러니 쓰기의 대상은 이제 시가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 자신의 쓰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밀도와 진실함이 된다. 마치 도공이 단 하나의 그릇을 만들기 위해 며칠이고 밤낮을 새워 다하는 그 정성스런 절실함처럼 말이다. 물론 그 절실함이 문득 맺혀 세상을 놀라게 할 그릇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 또한 여전히 오롯하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의 생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완벽한 생이란 이 세상에 없다. '완벽(完璧)'이란 본래 '흠 하나 없는 구슬'을 뜻하는 말이다. 다만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생을 온전하게 완성하고자 하는 어떤 절절한 태도다. 그때 당신의 생은 '매일 조금씩 갱신되며 타오를'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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