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 두 태극기

'빨간 날'만 되면 동네 골목엔 집집마다 어김없이 태극기가 펄럭인다. 나는 태극기를 꽂지 않았지만 우리 집 앞도 예외가 아니다. 집주인이 꽂지 않았다면? 태극기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이 오지랖 넓게 온 동네를 돌며 매번 게양과 회수를 반복하는 것 같지는 않다. 관공서밖에는 없겠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매일같이 등교하자마자 운동장의 국기를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나서야 교실로 향했던 세대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 장면처럼 하오의 나른한 시간을 가로지르는 사이렌, 멈춰지는 도시, 저마다의 가슴에 올려진 손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옛날 정권들이 바랐던 바대로, 태극기 사랑이야 이미 각인된 이념이다.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올라가는 태극기가 어찌 감동스럽지 않을쏘냐. 하지만 2016년에 개인의 선택과 의지를 관공서가 대체한 풍경은 왠지 스산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느들 힘든 거 안다. 암만 짬밥 먹어도 일어나라면 일어나야 하고, 밥 먹으러 가라고 해야 먹을 수 있고…. 그게 힘든 거지. 시키는 대로 하는 거." 병장 때, 겨울 훈련을 받다가 잠깐 장작불을 쬐게 해줬던 주임원사가 했던 말이다. '이제 마음잡고 공부해야지' 싶다가도 "공부 좀 해라!" 한 마디에 차갑게 식어버리는 학구열을 누군들 느껴보지 않았던가.  극단적인 예를 들어 전쟁 나면 마음속으로 깊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총을 들지, 관공서에서 태극기 꽂아놓은 집에서 죄다 뛰쳐나올 리야 만무하지 않나.  시킨다고 마음이 생기겠는가. 반감만 부를 뿐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절로 우러나야 진짜다. 자식을 잘 키우려면 부모의 백 마디 훈계보다 한 번이라도 올바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나. 국가가 국민의 행복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고 느끼면 좋아하지 않고 못 배길 것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입에 달고 살면서 태극기는 열심히 걸고 나라 사랑을 외쳐대면,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최근 한 TV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도산 안창호 선생의 후손들이 소개됐고 당시 독립운동에 쓰인 태극기도 선보였다. 사적인 삶을 접어두고 오직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선생의 일생은 진한 감동이었다. 존재의 가치는 사라졌을 때 잘 알 수 있듯이, 국가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우리 집 앞에 꽂힌 태극기와 그 태극기는 같은 문양이지만 천양지차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누군들 대한민국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 상징 역시 마찬가지다. 잘만 하면 시키지 않아도 애국하기 마련이다. 박철응 금융부 차장 h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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