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 무전유죄' 그 男子의 최후

'유전무죄 무전유죄' 최근에도 재벌이나 유력 정치인 등에 대한 솜방망이 판결이 나올 때마다 심심찮게 들리는 얘기다. 이 말의 유래는 1988년 10월의 일요일 서울 한복판 주택가에서 벌어진 인질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일은 27년 전 탈주범 지강헌이 서울 서대문 북가좌동 가정집에서 인질극 도중 사망한 날이다. 이 인질극은 전국에 중계됐으며 일요일이던 당시 국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던 미결수 12명이 호송버스를 탈취하고 교도관들의 권총을 빼앗아 서울로 달아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이들 중 지강헌을 비롯한 4명이 15일 밤 북가좌동 고모씨의 집에 침입해 고씨의 가족을 인질로 붙잡았다. 16일 새벽 고씨가 인질범들이 자는 사이 탈출해 신고를 하고 경찰 1000여명이 집을 포위하면서 대치가 시작됐다. 14시간 동안 이어지던 인질극은 범인 두 명이 권총으로 자살하고 이어 이 사건을 주도하던 지강헌이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면서 마무리됐다. 지강헌은 진입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병원에 옮겨졌지만 숨졌다. 인질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됐다. 지강헌은 탈주범 중 한 명인 강영일을 자수하도록 내보냈는데 강영일이 다시 들어오려고 하자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발밑에 총을 쏘며 제지했다고 한다. 정황으로 볼 때 나이가 어린 강영일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자신은 최후를 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강헌 사건을 다룬 영화 '홀리데이' 포스터

지강헌은 분명 흉악한 범죄자였지만 그가 인질극을 벌이는 도중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전 국민의 공감을 샀다. 지강헌은 556만원을 훔쳐 달아나다 17년형을 선고받았었다.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이 더해진 것이다. 지강헌에게 내려진 판결은 당시 밝혀진 것만 76억원을 횡령하고도 징역 7년을 선고받고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전경환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이다. 지강헌은 자신이 인질범 중 마지막 한 명이 되자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들어있는 테이프를 요구했다고 한다. 경찰이 이를 잘못 알아듣고 스콜피언의 '홀리데이'를 줬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두 개의 테이프를 받아 지강헌이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때문에 2006년 개봉한 지강헌 사건을 다룬 영화의 제목도 '홀리데이'였다. 지강헌이 최후를 맞은 지 27년이 지난 지금, 그가 꼬집었던 없는 사람은 경미한 죄로도 가중처벌을 받고, 있는 사람은 가벼운 처벌만으로 풀려나는 세태는 개선됐을까. 아직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김철현 기자 kc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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