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비-④조선의 세계화를 외친 여성 경영자 소현세자빈 강씨[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인조의 며느리인 소현세자빈(민회빈)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 중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세자빈이었지만 병자호란 패전에 따른 인질 신세가 돼 수천 리 나라 밖으로 떠났다. 하지만 강씨는 인질생활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운데 기회를 찾고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자로 변신했다.소현세자빈 강씨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청의 볼모로 잡혀가 선양(瀋陽)에서 힘든 고비를 넘겼고 귀국 후 삶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결국 시아버지인 인조의 의심으로 누명을 쓰고 역도로 몰려 세상을 떠났다. 숙종 때서야 '민회'라는 시호를 받고 명예가 회복됐다. 강씨의 죄명은 조선의 세계화를 외쳤다는 것이었다.병자호란 패전으로 타국서 생활…조선-淸 거래에 ‘인센티브’ 마케팅귀국 후 인조 의심으로 사약 받지만 조선이 그 능력 품었다면 역사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경영자=병자호란 이후 강씨는 소현세자, 봉림대군 부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수도 선양으로 끌려갔다. 울면서 조선을 떠나야 했지만 그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된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맡았다. 인조는 오랑캐에게 굴욕당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청나라와 직접 교류하지 않고 소현세자를 통해 모든 일을 처리했다. 중재과정에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 자금을 대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던 사람이 바로 강씨였다. 유목민족으로 군사력은 강하지만 문화적 수준이 떨어졌던 청나라는 조선의 물품을 필요로 했다. 강씨는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양관에서 청나라인과 활발한 거래를 시작한다. 소현세자는 청 황제의 수행으로 선양관을 비우는 일이 잦았으므로, 강씨는 세자의 역할을 대신해 조선에 보내는 장계까지 직접 챙기며 선양관의 실질적 경영자가 된다.이후 청이 선양관에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황무지를 내주자 강씨는 직접 농사를 지어 선양관 비용으로 사용했다.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속환해 농장에서 일하게 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생산량을 높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큰 수확을 이루며 한 해 필요한 양의 3배가 넘는 곡식이 선양관에 쌓였던 것으로 전해진다.이것만으로도 부족했다. 강씨는 직접 사무역에 뛰어들었고 선양에서 조선의 인삼, 약재 등을 파는 일을 주도했다. 강씨의 경영수완 덕에 선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을 진기한 물품과 바꾸는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씨는 생존하기 위해 조선시대 여성 이데올로기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시대 여성도 세계 무역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이들 부부가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됐다면 분명 조선은 변화했을 것이었다. ◆아랫사람을 품은 리더=소현세자는 선양에 있으면서 유학 강론을 폐지하고 천주교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또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을 모집해 둔전을 경작했고 그 곡식을 진기한 물품과 바꿔 무역했다. 현실주의자가 된 소현세자는 신하보다 노비들과 더 가깝게 지냈다. 강씨 또한 소현세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녀는 궁녀들을 더 가깝게 뒀다. 평소 강씨는 선양에서 무역업으로 모은 재산으로 궁녀들을 많이 챙겼다. 의복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인조는 귀국 후 이러한 며느리의 행동을 못마땅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씨는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아랫사람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조선이 당시 조금만 더 개방적이었다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땅이 좁았던 여성=소현세자빈 강씨는 조선의 구태의연한 여성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외국에서 충분히 발휘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리더십을 가진 강씨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또한 강씨의 세계관은 조선에서 받아들이기에 너무 빨랐다는 평가다. 인조는 소현세자 부부를 늘 의심했다. 청나라와 손잡은 아들이 자신을 폐하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의심으로 인조는 아버지의 사망 후 선양에서 잠시 귀국한 며느리가 빈소에 왕곡(往哭)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소현세자 부부는 1645년(인조 23년), 9년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부푼 가슴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부왕 인조의 냉대를 받고 귀국 두 달 만에 죽게 된다.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의 죽음이었다. 인조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를 덮고 소현세자와 강씨의 아들인 원손이 아닌,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강씨 역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그는 소용 조씨 저주사건과 인조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다. 세 아들은 유배되고 그의 어머니와 사형제는 처형당하거나 장살됐다.'인조실록'은 인조 재위 3년 강씨가 폐출될 때 “강빈(소현세자빈 강씨)이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에 실려 선인문을 나갔는데,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고 적었다. 인조는 당일 사약을 내려 강씨를 죽였다. 당시 사관이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이었다. 현대경제연구원 공동기획도움말: 역사학자 윤정란 조슬기나 기자 seul@<ⓒ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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