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초동여담] 월급쟁이 회장

시계아이콘읽는 시간58초

[초동여담] 월급쟁이 회장
AD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글로벌 기업의 한국 법인이 이사를 준비 중이다. 여의도에서 송도로 옮기려는 모양이다. 사무실 임대료 때문이다. 졸지에 직원들이 폭탄을 맞았다. 1시간 남짓한 출근길이 2시간 넘는 고생길로 바뀔 판이다. 일이 손에 잡힐 리 없다. 일부는 대놓고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흉흉한 말들이 빗발친다. "아니꼬우면 나가라는 거지." "이사 가면 좋은 인재가 오겠어?" 뼈아픈 말도 있다. "경영자에게는 눈앞의 실적만 중요한 거야."


경영자가 혁신을 '잘 아는 것'과 '잘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혁신에는 돈, 아이디어, 사람, 기술 등이 필요하지만 관건은 '시간'이다. 2~3년 임기의 경영자가 3~5년 이후 미래에 승부를 걸기는 쉽지 않다. 그들에게 중장기 비전은 과분한 숙제다. 흔히 말하는 '전문경영인'이 갖는 함정은 여기에 있다.

전문경영인은 지분 소유와 기업 경영을 분리하는 것이 투명하고 효율적이라는 기대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대주주보다 경영을 더 잘할 것이라는 믿음은 덤이다. 위기의 야후가 '스타 CEO' 머리사 메이어를 영입할 때만 해도 그런 기대가 컸지만, 결국은 몰락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메이어는 퇴직금으로 1억8600만달러(2102억원)를 챙겼다. 기업은 망해도 전문경영인은 배를 불렸다. 코카콜라, 맥도널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던 코닥의 파산도 같은 해석이 따라붙는다. '단기 성과에 주력하다보니 혁신에 실패했다.'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추락한 도요타를 오너가 복귀해서 살려낸 사례는 소유경영의 장점을 보여준다. 일론 머스크가 꿈만 같은 '화성 이민'에 집착할 수 있는 것도 대주주이자 회장이기에 가능하다. 월급쟁이 경영자였다면 분기, 반기, 연간 실적에 파묻혔을지 모른다. 라이벌이었던 LS전선과 대한전선의 운명도 소유경영인과 전문경영인에서 갈렸다. 잘나가던 대한전선은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추락했고 LS전선은 오너십에 힘입어 비상했다.


우리나라는 유독 소유경영에 비판적이다. 그럴 만도 하다. 대한민국 재계의 흑역사가 황제경영으로 시작해 오너경영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전문경영인이 슈퍼맨도 아니다. 그들에게 크립토나이트는 '임기'라는 빠듯한 시간이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학자시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너체제와 전문경영인체제는 장단점이 있어서 어느 것이 낫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안세연 서울대 장수기업연구센터 교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전문경영인에 의한 단기 실적보다 소유경영인에 의한 장기 전략이 기업의 생존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소유경영인이든 전문경영인이든, 기업혁신을 잘하면 그만이다.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