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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반 세기 현대 文壇을 지킨 '전봉건의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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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0주년 맞은 시 전문 문예지 '현대시학'
몇몇 시인의 전유물 아닌 범(凡)시단지 추구
'작품본위로 저울질한다'-전봉건의 정신 담아

[허진석의 책과 저자]반 세기 현대 文壇을 지킨 '전봉건의 혼’ 전봉건 시인 [사진=현대시학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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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처럼 걸어서 갔다. 서대문 교차로. 우체국을 찾아 뱀처럼 구부러진 골목을 더듬었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 오래된 이층 건물이 보였다. 길 쪽으로 난 나무 계단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몇 개 되지 않는, 그러나 언제나 아득한 높이. 마지막 계단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면, '현대시학'의 편집실이었다. 다락 같은 공간, 낮은 지붕 아래 그가 앉아 있었다. 전봉건. 1986년 여름.


시인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척추가 대지와 직각을 이뤘다. 수직의 가장 높은 데서 반듯한 이마가 빛을 냈다. 형형한 눈빛으로 골목을 바라보았다. 여름날의 태양빛을 꿰뚫은 시선에서 푸른빛을 느꼈다. 그 순간 등허리를 타고 내리던 땀방울이 바싹 말랐다. 시인은 이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왔어?" 시선은 다시 태양 속으로. 그때 머릿속 어느 구멍에서 시귀가 지네 대가리처럼 삐져나왔다. 글자 하나하나가 시큰하고도 따갑게 이마를 스쳤다.


'대나무/잎사귀가/칼질한다.//해가 지도록 칼질한다./달이 지도록 칼질한다./날마다 낮이 다 하도록 칼질하고/밤마다 밤이 다 새도록 칼질하다가/십년 이십년 백년 칼질하다가/대나무는 죽는다.//그렇다 대나무가 죽은 뒤/이 세상의 가장 마르고 주름진 손 하나가 와서/죽은 대나무의 뼈 단단하고 시퍼런/두 뼘만큼을 들고/바람 속을 간다.//그렇다 그 뒤/물빛보다 맑은 피리소리가 땅 끝에 선다/곧바로 선다.'('피리')


"곧바로 선다"는 저 한 줄. 전봉건의 자기 선언이다. "물빛보다 맑은 피리소리".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세이렌의 노래와도 같이 절망적이고도 가없는 슬픔의 소용돌이.


이건청은 전봉건 시의 훌륭한 독자다. 그는 2001년에 논문 '전봉건 시 연구'를 썼다. 논문은 전봉건 시인의 시 세계를 넷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 실린 내면 추구. 둘째, '속의 바다'와 '피리'가 보여준 상상력과 언어 추구. 셋째, '북의 고향'에 담은 분단과 실향. 넷째, '돌'에 실린 사물에 대한 관조. 전봉건의 삶을 꿰뚫고 지난 시간의 화살이다.


'눈 내린 광장을/한 마리 표범의 발자욱이 가로질렀다./너는 그렇게 나로부터 출발해 갔다./만월이 된 활처럼 팽창한 욕망,/너는 희한한 살기를 뿌리면서/내달았다… 검은 한 점이었다./나의 모든 꿈의 투기인 너.(후략)' 전봉건 시의 출발점, '꽃ㆍ천상의 악기ㆍ표범'의 세계는 이러하였다. 네 번째 '돌'의 세계에 이르러 그는 별자리를 가로지르는 나그네가 되었다. 비통과 체념 사이 어딘가에 작별과 초월이 있다.


'살은 모래로 보내고 피는 물로 보내고/그리고 넋은 하늘로 보낼 수가 있다면/아마도 나는 먼 훗날 작은 하나의 돌이 되어/다시 이 하늘 아래 모래와 물 곁으로/돌아올 것이다.//그때는 곱디고운 꽃빛 소리 스스로 자아내는/하늘 살갗의 돌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돌 55)


[허진석의 책과 저자]반 세기 현대 文壇을 지킨 '전봉건의 혼’ 현대시학 창간호

우리 문학사에 '현대시학'이 둘 나온다. 하나는 1966년 2월 김광림이 주재하여 창간했다가 1966년 10월 통권 9호로 종간되었다. 시 전문지로 서정주ㆍ조지훈ㆍ박목월ㆍ유치환ㆍ박남수ㆍ김광섭ㆍ신석초ㆍ박두진ㆍ신석정ㆍ김춘수ㆍ김수영 등이 작품을 냈다. 또 하나는 1969년 4월 전봉건이 주재하여 창간, 올해로 50년째를 맞는다. 창간 당시 편집위원은 박두진ㆍ박목월ㆍ박남수ㆍ구상ㆍ김춘수ㆍ전봉건이다.


이들은 창간사에서 "우리는 이 잡지를 몇몇 시인의 전유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범(凡)시단적으로 넓게 기회를 나누어주어 명실상부한 범시단지를 만들 생각"이라며 모든 것을 작품 본위로 저울질하겠다 다짐하였다. '작품 본위', 이 다짐이 '현대시학', 곧 전봉건의 정신이다. 아니, '현대시학'은 전봉건의 혼이다.


지난 화요일. '현대시학'의 전기화 발행인(59)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어지간히 들떴나 보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한 지난 18일 오후, 좋아하는 시를 찾아 읽으며 추억에 잠겼다. '피리' '돌' '피아노'…. 19일 새벽에는 설핏한 잠 속에서 충정로 편집실의 나무 계단을 걸어 올라가 그 푸른 눈빛을 마주치는 꿈을 꾸었다. 오전 10시를 전후로 폭설이 내린다고 했다. 눈발은 싱겁게 뒤를 흐렸다.


전봉건이 1988년 세상을 떠나고 정진규가 1988년 7월부터 '현대시학'의 주간을 맡아 편집실을 충정로에서 인사동으로 옮겼다. 인사동에 있는 '현대시학'에 두 번 갔다. 1990년이 마지막이었다. 그곳은 붐볐다. '현대시학'은 시단의 말석에 이름을 적은 내 시의 본적(本籍)이다. 그러나 나의 의식 속에서 전봉건이 사라진 이 잡지는 형해만 남은 관념에 불과했다.


위대한 시인의 평생에 걸친 노역과 고뇌를 상징하는 매체의 50년을 지나칠 수는 없다. 지난해 서거 30주년을 맞은 대시인의 영혼과도 같은 잡지. 거기에 본적을 둔 비루한 자의 책무나마 다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현대시학'을 찾아가 발행인을 만나기로 했다. 영애(令愛)는 2010년 9월에 '현대시학'의 발행인이 되었다. 생전의 시인을 빼닮아 인품이 개결하기 그지없다. 맑은 눈 속에서 시인의 불꽃을 보았다.


[허진석의 책과 저자]반 세기 현대 文壇을 지킨 '전봉건의 혼’ 현대시학 2019년 1, 2월호

편집실은 지금 안국동 윤보선길에 있다. 나는 33년 전에 낡은 건물 2층,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 시인을 보았다. 새 편집실은 지하층이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계단 하나하나가 시간을 헤아리라고 요구한다. 흰 벽을 수수한 서가로 장식하여 간결한 분위기가 방문객의 정신을 맑혔다. 발행인은 목소리가 나직했다. 그는 '현대시학'의 위대한 역사를 시인들의 공으로 돌렸다.


'현대시학'은 2017년 7, 8월호부터 월간에서 격월간으로 바꾸었다. 올해 1, 2월호부터는 판형을 국판에서 변형46판으로 바꾸었다. 새 감각, 새 다짐으로 시작하자는 의미를 담았다. 외양은 바뀌었으되 격조를 잃지는 않았다. 지난해 시인의 30주기는 영애의 뜻에 따라 검소하게 넘겼다. 그래도 잡지의 50주년은 귀함을 잊지 않았다. 가을에 특집호를 내고 간략한 행사를 열어 거룩한 세월을 새길 계획이라고 한다.


23일에 서울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제4회 전봉건문학상 시상식(수상자 이승희)을 연다. '현대시학' 창간인 전봉건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15년 제정한 상이다. 한 해 동안 발간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심사하여 수상자를 정한다. 시상식 일자에 맞춰 100여명의 시인들이 참여한 시 모음집 '시, 우주를 채우다'를 발표한다. 오는 10월 말에는 50주년 기념 세미나와 시 낭송 등 관련 행사도 연이어 열 예정이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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