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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민의 남산 딸깍발이] 가족의 해체, 중공업病 앓는 거제
최종수정 2019.02.08 14:26기사입력 2019.02.08 13:37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조선소 도시 거제의 빛과 그림자 조명…거제를 떠난 딸들은 돌아올까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거제에서는 강아지도 1만 원 지폐를 물고 다닌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의 어느 섬을 둘러싼 전설 같은 이야기다. 거제도는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한때는 연봉 1억 원을 받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중산층이 넘쳐나는 동네였다.


회사 로고와 부서, 자신의 이름이 찍힌 작업복을 입고 시내를 활보하는 무리들. 퇴근 이후에도 골목 곳곳의 수많은 식당, 술집에서는 똑같은 로고가 찍힌 작업복 사내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깊은 밤을 뜨겁게 달궜다.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LNG선에서 노동자들이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작업을 시작하는 모습./강진형 기자aymsdream@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끈끈한 '가족'의 관계를 맺어온 직장 동료들. 그들에게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로고가 찍힌 작업복은 동질감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다. 심지어 작업복을 입고 돌잔치, 결혼식, 소개팅 자리에 나서는 그들만의 당당함은 하나의 문화였다.


외부의 시선, 특히 서울의 시선으로 거제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넉넉한(?) 돈을 벌어다주며 가장의 위엄을 존중받는 아버지, 가정과 육아를 책임지며 문화와 취미생활을 즐기는 어머니. 거제도 '중공업 가족'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과거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세계 최강 대한민국 조선의 위상을 드높였던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져왔던 모습이다.

이러한 거제도의 기억은 모두 과거 버전이다.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삶을 강요받고 있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가 펴낸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조선소에서 일한 경험담을 토대로 거제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기록한(기억한) 책이다. 현장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와 생생한 묘사는 사회학 특유의 딱딱한 시선과는 거리가 멀다.


"딸들은 거제를 떠나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아빠들의 믿음을 저버렸다."


양 교수의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거제 중공업 가족의 현실을 관통하고 있다. 조선업의 불황이 시작되자 거제라는 거대한 섬을 떠받치고 있었던 거대한 외피가 사라지고 민낯이 드러났다.


"조선소 노동자 상당수는 희망퇴직을 하거나 해고당한 후 다음 진로를 찾아야 할 상황에 놓였다. '집사람'이었던 아내들은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일터를 찾아 나서기 시작됐다. 조선 산업의 위기가 산업도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거제도의 균형이 무너지는 상황은 모두에게 당혹스러운 장면이다. 그동안 애써 잊고 지냈던 차별의 현실이 도드라진 것도 이때다. 정규직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하청 노동자 그리고 외국에서 넘어온 비숙련 노동자들. 회사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뭉치던 것도 옛날 얘기다.


퇴근 이후에 자사 로고가 찍힌 작업복을 입은 채 시내를 활보하거나 여러 술집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장면은 누군가에게 낯선 풍경으로 느껴졌다. 40~50대와 20~30대의 세대차가 확인되면서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게 의문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대우조선해양 거제 옥포조선소 전경


"중공업 가족은 하청 노동자들을 배제했고, 여성들과 딸들의 공간을 결혼 생활의 영역에 한정지었다. 무엇보다도 중공업 가족은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젊은 세대에게 약점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거제에서 여성의 삶은 단조로웠다. 아빠의 요구에 따라 괜찮은 조선소 사무 보조직에 취직해 아빠가 소개해주는 정규직 조선업 직원을 만나 결혼하는 삶. 여성이 거제도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직장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거제도의 딸'은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거제도 경제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한동안 이어졌던 조선업 불황에서 벗어날 조짐이 엿보이고 있다. 중국에 빼앗겼던 선박 수주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을 되찾았다. 대우조선은 흑자로 전환됐다. 거제도 중공업 가족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최근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인수 소식이 들리면서 거제도는 술렁이고 있다. 작업복에 새겨 있던 '영광의' 그 로고는 바뀔 가능성이 크다. 거제도 경제에 호재인지 악재인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불안감이 감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 시장도 마찬가지다. 조선업 세계 패권 국가는 계속 바뀌었다. 1960년대 세계 조선업을 주름잡았던 영국은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세계 최고의 선박을 건조했던 영국의 조선소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는 황량한 공간으로 변했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일본은 사실상 조선업을 버리는 방안을 모색했다가 흐름을 바꾸었다. 조선업이 일자리 효자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셈이다. 문제는 사양 산업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설계 엔지니어는 물론이고 생산직 노동자들의 인력 풀도 협소해졌다는 점이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변화의 타이밍을 놓치면 대가는 혹독하다. 양 교수는 '불균형의 도시', 거제도를 바로잡는 실천이 문제를 풀어가는 해법의 시작이라고 진단했다.


"산업도시 거제에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보장된 정년과 높은 연봉으로 대표되던 정규직 노동자들은 유연성과 저성장의 세계에서 화석 같은 존재가 됐다.… 기존의 중공업 가족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공동체를 모색하며 내일을 이야기할 때가 됐다. 거제의 다음 주역은 누가 될까. 무엇보다도, 진학과 취업으로 다른 삶을 찾아 떠난 딸들이 돌아오고 싶어 하는 도시가 돼야 하지 않을까."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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