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최대열의 體讀]우아한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가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9초

[서평]복수의 심리학
날 것 그대로의 정의, 인간 원초적 욕구
낯선 괴물 아닌 주변에 존재하는 욕망
고대부터 인간·집단위협에 대한 반응

[최대열의 體讀]우아한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가
AD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 "복수의 일념으로 전전대통령의 오래된 개인비리 혐의를 집요하게 들춰내어 꼭 포토라인에 세워야만 했을까요? MB처럼 부메랑이 될 겁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기 직전인 지난 14일 오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남긴 소회다. 검사생활을 오래한 법조인이자 현재 제1 야당의 대표, MB정부 때는 여당의 원내대표를 한 노련한 정치인은 복수라는 프레임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래, 특히 시시각각 바뀌는 정치지형이 앞으로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자 경고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정권을 잡는다면 똑같이 되갚아주겠다는 의지의 표현과 다름없어서다. 홍 대표가 남긴 SNS의 흔적은, 복수는 나의 것이어야 한다는 심리가 깔려있다고 나는 본다. 물론 MB를 둘러싼 최근의 사태를 두고 복수보다는 정의구현에 가깝다고 보는 여론이 많지만 말이다.

정치보복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미국 닉슨 대통령의 정적명단이다. 명단은 1972년 워터게이트 청문회로 드러났다. "우리 행정부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반정권 인사를 관리하기 위해서,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정적을 엿 먹이는 데 연방정부 차원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결집하기 위해" 작성된 명단이었다. 정치인은 물론 보좌관, 언론인 수십 명이 사찰 당했고 탄압을 받았다. 닉슨 측은 이들 각 정적 명단별로 "반드시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 "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 "이 건은 스캔들을 터뜨리는 게 가장 효과적" "백인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함" 등의 설명이 붙었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복수의 심리학'의 저자 스티브 파인먼 영국 배스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했다. 야권의 유력정치인을 제압할 문건을 만들고 낯 뜨겁고 조악한 합성사진을 유포하는 등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양반' 수준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자 규모는 닉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긴 하지만.


노동ㆍ사회전공 쪽을 전공한 파인먼 교수는 그간 조직행동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연구했다. 파인먼 교수는 복수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욕구로 봤다. '날 것 그대로의 정의'로 본 것이다. 과거부터 지금껏 인류역사를 살펴보면서 복수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한편 공권력과 사법제도, 종교분야에서는 어떠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복수는 소설가와 극작가, 영화감독의 뮤즈이고 철학자와 사회과학자의 탐구대상"이라며 "나는 복수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낯선 괴물은 아니며 여러 면에서 우리는 복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고 했다.


금기시 하지만 권력의 이름으로 합법화
오디세이아 등 연극·영화 단골소재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사회에도 존재
섣부른 판단보다 인간조건의 성찰 계기로


[최대열의 體讀]우아한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가 100억원대 뇌물 수수 등 혐의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1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마련된 포토라인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책은 머리말과 맺는 글을 빼고 아홉 개 장으로 구성됐다. 먼저 복수라는 행위가 어떤 심리가 작용한 결과인지, 어디에 뿌리는 두고 있는지를 살핀 후 각각의 장에서는 과거 역사적 사건부터 개인적, 사회적, 정치ㆍ국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어떤 형태로 구현됐는지를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복수는 고대부터 개인과 집단의 위협에 대한 반응이었다. 고대 부족시대 때는 부족의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재산을 탐하는 자를 응징해왔고 국가가 등장한 이후에도 비슷한 상태가 이어졌다. '눈에는 눈'으로 알려진 동해보복법은 전 세계 곳곳에서 적용돼 위세를 떨쳤다. 유대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기독교 등 저마다의 종교 역시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복수를 금기시하곤 했지만 신의 심판이라는 명목으로 복수 행위를 정당화하곤 했다. 아랍권을 중심으로 한 지하드(성전)나 십자군 전쟁, 중세 마녀재판이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이나 연극, 영화에선 복수를 통한 카타르시스가 단골소재다. 서양 문학사에서 모험담의 원형으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를 이끄는 원동력은 복수심이다.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도 마찬가지다. 공동경비구역JSA로 영화감독 명성을 얻기 시작한 박찬욱은 곧바로 복수극 3부작을 쏟아냈다.


애초부터 시리즈물을 만들 의도는 없었고 우연히 3부작이 됐다고 하니 영감의 원천인 셈이다. 동명의 일본영화도 있는 '복수는 나의 것'은 장기밀매업자에게 신장을 잃은 주인공의 복수와 그 주인공에게 딸을 잃은 이의 복수, 그리고 복수에 성공한 후 곧바로 보복을 당하는 말 그대로 복수로 시작해 복수로 끝맺는 영화다. 프란체스카 사이먼이 쓴 '악동 헨리의 완벽한 하루', M.P 롤런드의 '심술선생의 일기'처럼 아동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다. 2000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 주민은 차를 몰고 가다 뜻하지 않게 비비원숭이 한 마리를 치어 죽인 일이 있었다. 그 주민은 며칠이 지난 후 같은 곳을 지나가는데 그의 차를 알아본 비비원숭이 한 마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원숭이 무리는 일제히 차에 돌멩이를 던졌다. 파인먼은 "영장류 공통의 복수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라며 "인간과 유전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동물종인 이들의 행동에 인간 복수의 모든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면서도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단 물음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복수를 통해 인간조건에 대한 어떤 성찰이 가능할지, 복수는 비난이 따르지만 정말 항상 비난받는 게 맞는지, 좋은 복수와 나쁜 복수 사이를 구분하는 게 가능할지. 복수의 맨 얼굴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생각할 계기를 주려는 게 저자의 의도인 듯 보인다. 복수를 금기로만 터부시하기엔 너무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