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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의 갤러리산책] 머리카락은 일상의 필름…이번 작업은 소통의 뜨거운 연서다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30초

황재형 개인전 ‘십만 개의 머리카락’
격렬한 명암대비 거친 입체감 통해 감정 이입
일반 회화보다 세 배이상 더 걸린 고도의 작업
태백 광산촌 살이…궁핍·열정의 창작물

[김세영의 갤러리산책] 머리카락은 일상의 필름…이번 작업은 소통의 뜨거운 연서다 황재형 작가 [사진=가나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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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세영 기자]"머리카락에는 생명력이 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일상의 모든 것이 기록된 필름과도 같다. 이번 작업은 내가 아닌 우리가 해낸 것으로 관람객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戀書)다. 예술은 주관성보다 소통의 의미가 더 커야 한다."

황재형(65)이 5년 전부터 구상한 신작의 특징은 머리카락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머리카락을 이용해 고도의 감정 표현, 격렬한 명암대비를 이루어냈다. 멀리서 볼 땐 깔끔한 수묵화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머리카락의 거친 입체감으로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거기에 고된 삶과 노동의 현장이 오롯이 담긴다.


재료가 머리카락이라는 사실을 알면, 비위가 약한 이들은 거북할 수 있다. 하지만 황재형은 "물감은 단순히 내 감정을 전달하는 매우 주관적인 재료다. 물감으로 그리면 기술 자랑만 하게 될 뿐이다.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물감은 자유로워 내 기호와 감성이 모두 쏟아져 도를 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머리카락은 내 마음대로, 성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만큼 머리카락은 생생히 살아있는 이웃의 숨결이자 존재감, 또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의 모습과 가장 닮아 오히려 불편함을 줄 수 있으나 이는 우리의 배타적인 사고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생생히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데 매력을 느껴 작업으로 끌어들였다"고 했다.


[김세영의 갤러리산책] 머리카락은 일상의 필름…이번 작업은 소통의 뜨거운 연서다 황재형, 드러난 얼굴, 2017, 캔버스에 머리카락, 162.2x130.3㎝



재료의 특성상 인물의 눈, 코, 입 등을 그릴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는 머리카락의 간격과 양에 차이를 두며 명암에 특히 신경을 쓴다.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린 다음 그 위에 모아 둔 머리카락을 펼쳐 형상을 만든다. 밝은 곳은 넓게 비워두고, 어두운 곳은 조밀하게 해 접착제(미디움)로 붙이는 식이다. 작업 시간은 보통 회화보다 세 배 이상 걸리며 고도의 집중력도 필요하다. 손은 망가지기 십상이고, 눈에선 실핏줄이 터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힘든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가 있다. 넉넉지 않은 사정이 첫째 이유였다. 그 다음은 신념. 민중미술가인 황재형은 1981년 대학졸업 후 지금까지 줄곧 태백 광산촌에서 살았다. 1년 뒤 그는 이종구, 송창 등과 함께 '임술년(壬戌年)'을 조직했다. 임술년은 모순된 사회현실에 저항하는 민중미술 운동으로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그는 태백의 탄광촌을 찾아 들어가 노동자들의 생활현장을 겪으며, 그곳의 풍광을 그렸다.


탄광촌 생활 초기에는 흙을 채취해 애용했다. 물감을 살 수 없어 석탄과 황토, 백토 등을 개서 발라 노동 현장을 표현했다. 궁여지책이었지만 덕분에 자연의 물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떠올린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김세영의 갤러리산책] 머리카락은 일상의 필름…이번 작업은 소통의 뜨거운 연서다 황재형, 볕바라기, 2016, 캔버스에 머리카락, 130.3x162.2㎝


[김세영의 갤러리산책] 머리카락은 일상의 필름…이번 작업은 소통의 뜨거운 연서다 황재형, 둔덕고개, 2017, 캔버스에 머리카락, 128x259㎝



가난한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했다. 작품은 극현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친다. 황재형은 "나부터 가족들, 주변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모으기 시작했다. 많은 양이 필요할 때는 태백의 미용실을 돌아다니며 모았다. 태백은 뿌리 뽑힌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다. 함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 많은 곳에서 나의 주관을 더하기보다 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머리카락 10만 개는 한 인간의 평균 머리카락 수다. 그 수만큼 작품에는 태백에서 함께 지낸 광부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한 소중함이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함께 노동하고 저항하며 몸을 부대꼈지만 광부들에게 항상 죄책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이웃들에게 가졌던 미안함, 불충분함이 메워졌다. 노동하는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 노동의 슬픔과 기쁨을 그릴 때 내 생각으로만 끝날 순 없었다. 머리카락을 사용하면서부터 부끄러움을 덜 수 있었다"고 했다.


황재형의 개인전 '십만 개의 머리카락'은 14일부터 내년 1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지난 2년 동안 작업한 평면작품 서른 점을 감상할 수 있다.


[김세영의 갤러리산책] 머리카락은 일상의 필름…이번 작업은 소통의 뜨거운 연서다 황재형, 삼배구고두, 2017, 캔버스에 머리카락, 259x169.5㎝


[김세영의 갤러리산책] 머리카락은 일상의 필름…이번 작업은 소통의 뜨거운 연서다 황재형, 기다리는 사람들 II, 2016, 캔버스에 머리카락, 97x162.2㎝


[김세영의 갤러리산책] 머리카락은 일상의 필름…이번 작업은 소통의 뜨거운 연서다 황재형, 아직도 가야할 땅이 남아 있는지, 2016, 캔버스에 머리카락, 191.3x175.4㎝



문화부 기자 ksy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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