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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차별의 내재화 그리고 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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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차별의 내재화 그리고 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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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 한국전쟁 후 1957년 전국에서 백정(白丁) 출신들이 진주 시내로 모여들었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모인 이들은 '형평장'이라는 이름으로 9일을 함께했다. 장례식 때는 상여 뒤로 만장(輓章)이 끝없이 휘날렸고, 장지에서 진주 시내까지 이를 따르는 행렬이 이어졌다.


1882년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1919년 진주에서 3ㆍ1운동을 이끌었으며 신분 차별에 분노해 백정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던 '양반 강상호'는 그렇게 그를 아끼던 사람들과 이별했다. 이미 철폐된 차별의 잔재와 습관을 완전히 청산하는 것이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앞당기는 일이라 믿었던 것일까. 강상호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 재산을 바쳐 형평(衡平)운동을 벌였다. 한국의 근대사가 기록한 최초의 인권운동이었다. 9일에 걸친 형평장은 여기서 왔다.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볼 수 없는 존재.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됐음에도, 3ㆍ1운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조선인 사회 내에서도 백정은 여전히 '우리' 안에 속하지 못했다. 개를 잡으라는 강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맞아 죽어도 호적이 없어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돈이 있어도 학교를 보내지 못했던 타자화(他者化)된 대상이었다. 강상호라는 한 사람의 평생을 건 노력에도 전근대가 남긴 노골적인 신분 차별은 한반도를 휩쓴 또 다른 비극 한국전쟁을 거치고 나서야 사라졌다.


반세기가 지난 1997년. 대한민국을 급습한 외환 위기는 새로운 차별을 낳았다. 노동 유연성 강화와 기업의 경쟁력 제고라는 명분으로 기간제 고용이 일반화됐다. 현대판 노예제라 일컬어지는 '비정규직'이다. 20년이 훌쩍 넘은 현재 서로의 차이를 나타내는 기준으로 뿌리를 내렸고, 많은 경우 정규직이 되지 못한 미완의 객체로 차별받고 있다. 그리고 그 차별은 깨닫지 못한 사이 내재화됐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또 한 명의 청년이 작업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회사의 직원들은 퇴근을 서두를 무렵 출근해 세차게 도는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해야 했던 그의 신분은 24세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였다. 2년7개월 전 서울 구의역에서 홀로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다 숨진 19세 청년의 신분도 그랬다. 차별은 청년들의 생명을 비용 절감을 위한 거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다. 무관심한 모두가 가해자다.


[초동여담] 차별의 내재화 그리고 착취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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