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백년가게]'노맥의 원조' 위치도, 맛도…38년전 그대로
최종수정 2018.09.20 15:14기사입력 2018.09.13 13:52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30년 이상 도소매ㆍ음식업을 영위하는 소상인들 중 전문성, 제품ㆍ서비스, 마케팅 차별성 등 일정 수준의 혁신성을 가진 기업을 발굴해 '백년가게'로 육성하기로 했다. 대(代)를 이어가며 100년 전통을 자랑할 한국의 백년가게를 소개한다.<편집자주>

[한국의 백년가게]①을지OB베어
부친이 '냉장숙성생맥주' 무기로 노가리 안주 개발
인쇄골목 노동자들과 서민들 삶 파고들어

서울 을지로 을지OB베어 강호신 사장


"장수 비결이요? 글쎄…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든 게 아닐까 싶어요."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터줏대감인 '을지OB베어' 강호신(59) 사장은 지난 11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을지OB베어는 이 곳의 1호 '노맥(노가리+맥주)' 가게다. '노맥의 원조'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80년 12월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38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물 뒤 주차장에 테이블을 놓고 손님 받는 걸 빼면 위치도, 모양새도, 맥주 맛도, 매콤한 고추장 맛도 전부 38년 전 그대로다.
을지OB베어때문에 골목이 유명해지면서 지금은 20곳 가까운 노맥 가게가 영업을 하고 있다. 맥주 500cc 한 잔에 3500원, 노가리 한 마리에 1000원. 단돈 만원만 있어도 한두명이 목을 축이기에 충분하다.

노가리로 유명하지만 노가리 팔아서 남는 건 별로 없을뿐더러, 강원도에서 건조와 가공까지 해 가져오는 비용을 따지면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한다. 강 사장은 "주인공은 예나 지금이나 맥주"라면서 "노가리 안주는 맥주만 드시면 심심할 것 같아 개발한 서비스 먹거리"라고 설명했다.

노가리 안주를 개발한 이는 강 사장의 아버지 강효근(92)씨다. 그는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를 팔려고 가게를 차렸다. 급속냉각기를 쓰지 않고 디스펜서와 연결된 냉장고에 케그(맥주통)를 통째로 넣어 온도를 관리하는 '냉장숙성맥주'가 무기였다.

초창기에는 OB맥주 본사가 제공하는 100원짜리 마른안주세트가 있었는데, 주류공급자의 안주공급은 불법이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판단 탓에 노가리를 새 안주메뉴로 개발하게 됐다.

강효근씨는 90세이던 2016년까지 가게를 지키다가 딸에게 자리를 넘겼다. 2013년까지는 오전 7시를 조금 넘겨 가게를 열고 밤 10시까지 영업을 했다. 밤샘근무를 마치고 한 잔 하러 찾아오는 인쇄골목 노동자들, 야간근무를 끝낸 뒤 주간조와 교대하고 찾아오는 지하철역 노동자들 같은 단골 손님들을 생각해서였다.

을지OB베어를 창업한 강효근씨

테이블로 가득한 가게 옆 공간은 원래 주차장이었다. 6평 남짓한 가게에 아침부터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맥주와 노가리를 받아 주차장 구석에 신문지나 박스를 깔고 먹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그 분들하고 같이 살아오신 거예요. 이 가게는 그냥 가게가 아니라 그 분들 일상의 일부였던 것이고요. 그런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약속을 지켜내려 아버지가 젊음 바쳐 기울인 노력이 가게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이른 오전 대뜸 가게로 찾아와 맥주 한 잔 하면 안되겠느냐는 어르신들이 적잖다고 한다. 그 시절의 정취를 잊지 못해서다. 강 사장은 "제가 가게에 나와있는 한, 아직 오픈을 안 했어도 그런 어르신들에게는 대접을 해드린다"면서 "'내가 자네 아버지하고', '자네 아버지 때부터'라고 시작하는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으면 저도 많은 걸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맥주 가게가 아침부터 문을 열었던 것도 특이하지만 밤 10시에 문을 닫았던 것도 조금은 이상하다. 강 사장은 "아버지는 황해도에서 큰형님하고 넘어오셨고 다른 가족은 다 거기에 계셨다"면서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신 거다. '내가 일찍 문을 닫아야 손님들이 그 때라도 들어가서 가족들하고 시간 보낼 거 아니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설명했다.

인쇄골목 경기가 예전만 못하고 손님들의 생활패턴도 많이 바뀐 탓에 지금은 정오부터 밤 11시까지 영업을 한다. 문을 여닫는 시간은 조금 달라졌지만 겨울에는 4도 여름에는 2도, 여기에 모자라지도 이걸 넘어서지도 않도록 맥주를 관리하는 원칙만은 38년 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강 사장은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앞으로 30년 넘게 이 자리에서, 사람들하고 같이 살아가고 싶다"면서 "지금으로부터 30년 뒤에도 맥주 맛은 그대로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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