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별세]마지막 3金 '구름의 정원' 속으로
최종수정 2018.06.25 11:50기사입력 2018.06.25 11:50
조문객들이 24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아시아경제 성기호 기자]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오전 8시15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92세로 별세했다. 2009년 김대중(DJ), 2015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이은 김 전 총리의 타계로 현대정치사를 쥐락펴락했던 '3김씨'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완고한 지역주의와 1인 보스의 리더십에 의존한 '3김 정치'도 유권자의 정치의식이 바뀜에 따라 이미 종언을 고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정치의 중심은 3김이었다. DJ는 호남, YS는 부산ㆍ경남(PK), JP는 충청을 기반으로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다. 이들이 힘을 합치고 갈라설 때마다 정치는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1990년 '3당 합당'은 지역주의 정치의 정점을 찍었다. 신민주공화당을 이끌던 JP와 통일민주당의 YS는 1988년 총선에서 제1야당에 오른 평화민주당을 배제하고 여당인 민정당과 합당했다. 기형적 합당으로 정당 정치는 퇴행했고 호남을 고립시킨 영남 패권 구도가 자리 잡는 듯했다.

이 같은 지역 구도는 지난 13일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사상 처음으로 PK 지역을 석권함으로써 깨졌다는 얘기가 나왔다. 무려 28년 만이다. 정치권에는 여전히 계파 정치가 잔존하지만 정치자금 투명화와 경선제 도입 등으로 1인 보스가 당권을 쥐고 흔드는 구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3김이 퇴장한 자리도 새로운 시대 정신이 채운 상태다.
김 전 총리는 사망 당시 신당동 자택에서 119 구급대에 의해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이미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총리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공주중, 대전사범,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하고 임관했다.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소장의 5ㆍ16 쿠데타에 참여하면서 우리 현대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정권의 2인자로서 산업화 시대 권력의 틀을 짰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올랐고, 45세에는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이후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총리는 신군부 등장 뒤 가택 연금을 당했지만 1986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산물인 대통령 직선제로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섰다. YS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YS는 이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됐으나 김 전 총리는 자유민주연합을 만들며 결별했다. 이후 1997년 대선에선 DJ와 'DJP 연합'을 성사시켜 첫 정권 교체를 이뤘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줄곧 '2인자' '킹 메이커'에 머물러야 했다.

고인은 2004년 총선 패배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2008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병상을 지켜왔다.

고인은 화려한 이력만큼 수많은 어록도 남겼다. 1980년의 '서울의 봄'을 두고는 '춘래불사춘'이라고 표현했다. 신군부의 등장을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2011년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내각제 개헌 유보 움직임을 보이자 '몽니'라는 단어로 일축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자신의 성정처럼 직설적인 발언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김 전 총리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산업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정권 교체를 이룬 큰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독재 정권을 옹호했고, 지역주의와 계파주의를 심화시켜 정당 정치를 퇴행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성기호 기자 kihoyey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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