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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죽지 못하는 '절대 갑'들의 세상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18초

[조인경의 책과의 수다]공지영 신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집안의 절대 '갑' 할머니 막강한 재력 안고 병석에 눕자
알수없는 힘에 휘둘린 듯 주위엔 섬뜩한 일만…


죽어도 죽지 못하는 '절대 갑'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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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인경 기자] 늘 그렇듯, 공지영의 소설에는 우리 사회의 아픈 구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미 10여년 전에 쓴 이야기인데도 마치 엊그제 어느 날쯤 뚝딱 써내려간 듯 말이다. "늙고(나이가 아닌) 강한 것들이 죽지도 않은 채 약하고 여리며 상처 입은 것들을 착취하고 말살하면서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이한 모습을 그렸다"는 작가의 말처럼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를 분노하게 한 거대한 기득권층의 횡포가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진다.

표제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이 같은 현실의식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겨우 열아홉살 여고생에 불과하지만 '이런 일이 지금 우리 집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할머니는 부동산 투자의 귀재,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다. 막강한 재력을 무기 삼아 집안의 절대 '갑'으로 군림해 왔으나 몇 달 전부터 병석에 누워 생과 사를 오가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의 생의 갈림길에서 집안은 겉으론 애통한 울음으로, 하지만 속내는 온통 재산분배 문제로 들썩인다.

문제는 할머니가 죽을 듯 죽지 않는 데 있다. 워낙 탐욕이 강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던 이의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인지 할머니를 대신해 이제껏 멀쩡하던 주변의 가족과 사람, 동물, 식물이 죽어나가는 과정이 섬뜩하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던 할머니는 기묘하게도 누군가 죽고 나면 번번이 벌떡벌떡 되살아난다.


주인공은 할머니가 돈의 힘으로 자신보다 약한 자들의 생명력을 흡수해 영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면서부터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낀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저 알 수 없는 힘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잡는다. 죽음에 직면한 할머니를 둘러싸고 또 다른 죽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나와 내 여동생이 살아날 방도를 아는 분들의 전갈을 바란다'며 남긴 이메일 주소는 다름 아닌 '헬조선닷컴(hellchosun.com)'.


결국 이 소설은 돈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우화적 비판을 드러낸다. 지극히 속물적인 이 집안의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안타깝기보다는 섬뜩하고 추한 실제이다. '절대 갑'들은 죽고 싶지 않아, 혹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화석화된 삶'을 연명해 나가는 동안 영문도 모르는는 '을'들만 죽어나가고 있는 현실!


물론 이 책에는 기괴한 얘기만 있는 건 아니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와 대척점에 서 있는 또 다른 작품 '부활 무렵'은 반대로 '상처받은 것들, 약한 것들, 어린 것들에 대한 지지와 연민'을 보낸다.


생활고에 쫓겨 한 신도시의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는 주인공 순례는 다리를 다친 부엉이, 양계장에서 폐기 처분된 닭, 죽어가는 화초 등을 모두 집안으로 가져와 살려내는 인물로 설정돼 있다. 스스로는 최저의 상태, '을 중의 을'이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살려내고 치유하는 캐릭터다.


다행인 것은 우리 현실이 소설보다는 한 발 더 나가 어찌어찌 헬조선을 넘어서려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무한권력을 누릴 것 같았던 이들이 이제는 영어의 몸이 되고, 서로를 보듬어가며 살던 순례들은 '어찌해 볼 수 있는 영역' 너머까지 들고 일어났으니 말이다.


죽어도 죽지 못하는 '절대 갑'들의 세상 공지영 지음/해냄/1만2000원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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