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연산군과 광해군, '제왕적 권력'을 심판하던 그날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14초

역사의 눈 - 백성과 노비들이 돌 던지고 욕설 퍼부었다, 그걸 민심이라 부른 조선


연산군과 광해군, '제왕적 권력'을 심판하던 그날 내일 (10일) 오전 11시 박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연산군, 광해군 대 반정의 기록은 오늘의 우리 상황과 묘하게 닮아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AD


[아시아경제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불출석은 ‘혐의’를 인정하는 피신청인이 자기방어 의지가 없을 경우에 해당한다.”

야당 의원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 말은 지난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소추위원이었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노 대통령을 향해 던진 말로, 이번 탄핵심판을 통해 고스란히 자신과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마지막 변론에도 불출석한 박 대통령을 향한 국민적 비난과 응원이 혼재하는 가운데, 역사상 부정부패로 인해 폐위된 왕들의 말로는 조선시대의 사법처리와 권력자의 최후를 낱낱이 투영하고 있어 현재의 ‘탄핵재판, 그 후’를 예측하는 가늠자로 앞선 길잡이와 같은 자취를 남기고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 '제왕적 권력'을 심판하던 그날 영화 '간신'에서 그려지는 연산군(김강우 役)은 음탕함에 사로잡혀 정사를 멀리하고 폭정을 일삼는 폭군 캐릭터로 등장해 관객들에게 충격을 선사한 바 있다. 사진 = 영화 '간신' 스틸 컷

연산군 향해 날아드는 돌팔매질, 원조 ‘염병하네’


조선왕조 역사상 첫 반정 대상은 연산군이었다. 개국 후 114년이 되던 해, 그의 재위 12년째에 벌어진 중종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왕에서 군으로 강등된 그의 폐위 사유는 오늘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비견해도 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막장’을 방불케 하는 극적 사건의 연속이라 일일이 열거하기 벅찰 정도. 아버지인 성종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고 폐서인 강등 후 사사된 친모 폐비 윤씨 사건을 기화로 벌인 갑자사화 이후 비교적 부왕의 치세를 이어받아 정사를 돌보던 그는 한순간에 광인이 되어 기상천외한 만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집권 초기 대신들과 시국을 논하는 경연 참여를 부지런히 하던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이를 없애 토론의 장을 막고, 성균관을 폐쇄한 뒤 그 자리를 놀이터로 삼았는가 하면 직언을 고하는 신하들의 발언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 ‘입은 몸을 베는 칼’이란 글귀를 담은 패) 착용을 명령했다. 그중 가장 극악스러운 악행은 생모 윤씨의 폐비를 주도한 부왕의 후궁 정 귀인과 엄 귀인을 각각 그들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으로 하여금 때려죽이게 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갈가리 찢어 산에 내다 버리고, 모친을 구타한 두 아들은 귀양 보낸 뒤 사약을 내려 죽인 사건으로, 계모와 이복동생 간의 패륜을 주도한 연산군의 만행에 할머니 인수대비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만다.


이 밖에도 전국에 채홍사를 보내 미녀를 끌고 와 집현전의 유생을 내쫓고 머물게 했는가 하면 민가의 아낙으로부터 신료의 아내까지 가리지 않고 간음하여 지탄을 받았고, 노비 출신 후궁 장녹수를 총애해 그녀가 재물을 모으고 매관매직을 일삼은 것을 눈감아주었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은 이내 유배지인 강화도 교동으로 이송됐는데, 그 행길이 알려지자 도성 안 백성들이 몰려나와 그를 향해 삿대질과 돌팔매질을 계속해대는 통에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고초를 겪었고, 안치된 유배지의 별감과 상궁의 조롱과 멸시 속에 2개월 만인 1506년 음력 11월 역질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향년 31세였다.


연산군과 광해군, '제왕적 권력'을 심판하던 그날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이병헌은 광해군, 그리고 그와 얼굴이 똑같은 광대 하선 1인 2역을 선보이며 명민하나 당쟁 사이에서 간계를 펼치는 군왕으로서의 광해를 사실적으로 선보여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스틸 컷


변복하고 도주하다 끝내 붙잡힌 광해군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의 사기를 회복하는 데 앞장 선 인물은 왕인 선조가 아닌 그의 아들 광해군이었다. 왕자 시절부터 그 총명함을 인정받아 일찍이 왕재(王才)로 주목받았고, 전란이 발생하자 궁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한 왕을 대신해 분할한 조정을 이끌어 왜군에 맞선 유능한 왕실 사람이었다. 전란이 종식되고 아버지 선조의 의심과 열등감, 그리고 갓 태어난 이복동생 영창대군의 존재로 인해 광해군의 세자지위는 수시로 위태로웠으나 어렵사리 왕위를 계승한 그는 어떤 연유로 왕의 자리에서 내쳐졌을까?


부왕 선조는 죽는 그 순간까지 후계확정을 미루다 결국 광해군에게 왕좌를 넘겼으나, 즉위 초부터 계속된 왕권위협은 광해군을 자리보전에 매달리는 신경증적 광인으로 몰아갔다. 적통이자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그를 끊임없이 정통성 문제로 괴롭혔고, 친형 임해군을 내세운 반란을 위시한 봉산옥사, 계축화옥 등 끊이지 않는 역모는 이내 광해군을 형, 동생, 신하를 대상으로 한 가차 없는 친국(親鞫, 왕이 직접 죄인 심문을 주관함)에 매진케 했다.


전쟁 후 공포에 군사력을 강화하고 전후 복구 및 기록물 편찬 사업을 펼친 것은 그의 공적이었으나 무리한 궁궐공사에 매달려 소실된 종묘를 중건하고 창덕궁을 완성한 뒤 창경궁을 중수하고 경덕궁, 인경궁, 자수궁 등 끝없이 궁궐공사를 시행했는데 이는 전쟁의 복판서 그가 목도한 끔찍한 광경과 이를 피하기 위한 길흉화복, 풍수에 집착한 그의 성정에 기인한다. 이를 견디다 못한 반정군이 인조를 옹립하고 궁궐에 침입하자 그는 궁인들이 출입할 때 이용하던 궁궐 담을 사다리를 타고 넘어가 심복 안국신의 집에 베옷과 짚신 차림으로 상중인 사람인체 위장하다 붙들려와 연산군과 같은 교동에 위리안치되는데, 이때 광해군과 함께 유배지로 나간 궁녀 한 명이 폐주를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는데 그 내용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정확해 오늘의 국정농단 세력에 던져도 손색없는 명문으로 전해온다.



연산군과 광해군, '제왕적 권력'을 심판하던 그날 조선 후기 문신 정재륜이 쓴 '공사견문'에 등장하는 유배지에서의 광해군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인데 특히 그를 모시는 임무를 맡은 궁녀 한 명이 그에게 쏟아낸 독설은 오늘날 국정농단 세력에게도 적용될만큼 신랄하며 통렬하다. 사진 = EBS '조선의 커리어우먼 궁녀' 화면 캡쳐


“영감이 일찍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온갖 관청이 다달이 올려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더러운 자들에게 반찬을 요구하여 심지어 김치판서[沈菜判書]ㆍ잡채참판(雜菜參判)이란 말까지 있게 하였소? 철에 따라 비단 용포와 털옷을 올리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사사로 올리는 길을 크게 열어 심지어는 장사치·통역관으로 하여금 벼슬길에 통할 수 있게 하였소? 영감께서 사직을 받들지 못하여 국가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해놓고, 이 섬에 들어와서는 도리어 나에게 모시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속으로 부끄럽지 않소? 영감께서 왕위를 잃은 것은 스스로 취한 것이지마는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속에 갇혀 있단 말이오?”


- 공사견문 중 (효종의 부마 정재륜이 궁중에 출입하며 견문한 것을 기록한 책)


연산군은 폐위되기 몇 해 전,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선왕의 실록 사초를 살피는 과정에서 스스로 “人君所畏者 史而已,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국정농단의 책임을 지고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는 우리 시대 최고 권력자는 과연 역사를 두려워하고 있을까?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