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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아욱을 뽑고 베틀을 없애기 바라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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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아욱을 뽑고 베틀을 없애기 바라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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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때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는 역사서의 전범이다. 2100년쯤 전에 쓰인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하는 편년체 대신 입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사관(史觀)을 가미한 기전체(紀傳體)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왕조 흥망사를 정리한 본기(本紀), 연표인 표(表) 등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인물사라 할 '열전(列傳)'이 예로부터 많이 읽힌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유익한 교훈을 만날 수 있어서다.


예를 들면 '순리(循吏)열전'이 그렇다. 순리란 법을 잘 지켜 백성들을 위하는 청렴한 관리를 가리키는 말로 무자비하고 혹독한 관리를 뜻하는 혹리(酷吏)나 썩은 관리란 오리(汚吏)의 반대라 보면 되겠다. 여기 노(魯)나라 박사 공의휴(公儀休)가 주인공인 발규거직(拔葵去織)의 이야기가 나온다.


공의휴가 어느 날 집에서 아욱국을 먹으니 아주 맛있었다. "가을 아욱은 문 닫아 걸고 먹는다"는, 중국에선 '채소의 왕'이라 꼽히는 그 아욱이다. 집안사람에게 물으니 뒷밭에서 키운 것으로 끓였다 했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텃밭의 아욱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발규(拔葵)다. 또 하루는 부인이 베틀에 앉아 직접 베를 짜고 있는 걸 보았다. 자기가 짠 베가 더 좋고, 가계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라 했다. 공의휴는 바로 베틀을 불 질러 버렸다. 바로 거직(去織)이다. 이를 두고 사마천은 "녹을 먹는 자로 아래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없었고, 큰 것을 받는 자로 하여금 작은 것을 취하는 일이 없게 했다"고 평했다.


공의휴 사례는 개인의 덕목이 빛난 경우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관리의 청렴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피혐(避嫌)과 상피(相避)다. 피혐은 혐의를 받는다는 피혐(被嫌)과 다르다. '혐의가 있을 경우 맡은 일에서 피해 있음'이란 뜻이다. 예를 들어 사간원이나 사헌부에서 탄핵당한 관리는 그 진위를 떠나 당분간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대기하면서 피혐하는 것이 관례였다.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정지해서 결백을 입증하고, 조사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조사의 공정성을 보여주려는 의미로 해석된다.


상피는 일정 범위 내 친족 간에는 같은 부서나 유관기관의 벼슬을 맡지 못하게 하는 조치다. 원래는 지방관을 임명할 때 특별한 연고가 있는 지역에 파견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가리켰다. 자료를 찾아보니 성종 10년(1479) 사례가 나온다. 대사헌 어세겸은 동생 어세공이 무관 인사를 총괄하는 병조판서가 되자 면직을 요청했다. "사헌부는 병조의 분경(奔競ㆍ벼슬자리 청탁 운동)을 살피고 인사의 잘못을 탄핵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요즘 말로 하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이해의 충돌' 의혹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였던 셈이다.


다소 뜬금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현 정부의 몇몇 공직자를 둘러싼 논란 탓이다. 지난달 재개발 투기 의혹이 불거져 불명예 퇴진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불법대출 등 그 뒤처리가 잠잠하다. 주식투자를 둘러싼 이해충돌 의혹을 두고 논란이 컸던 이미선 헌법재판관은 임명이 강행됐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며칠 전엔 김명수 대법원장 공관에 대기업의 사내변호사인 며느리가 입주해 있다 해서 화제가 됐다.


시대는 바뀌었고, 고위 공직자라 해서 내 집 마련이나 재산 증식을 도외시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이긴 하다. 공의휴 역시 그 시대에 드문 청렴한 관리였기에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또한 부자가 같은 집에 사는 것을 막는 규정도 없고, 대법원장 일가의 합가가 특정 대기업의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도 없다. 그렇다 해도 입맛은 쓰다. 발규거직의 고사를 안다면, 피혐과 상피의 정신을 잇는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 정치는 진보하고 있는 걸까.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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