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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여왕과 두 여자 '권력 암투'...끝에는 차가운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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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이종길의 영화읽기]여왕과 두 여자 '권력 암투'...끝에는 차가운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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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요르고스 란티모스(46) 감독은 영화에서 사랑이나 우정을 비관적으로 그린다. '랍스터(2015년)'에서 데이비드(콜린 파렐)는 45일 동안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될 위기에 놓인다. 힘들게 고비를 넘기고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만 갖가지 장애를 감당하지 못한다. '킬링 디어(2017년)'에서 외과의사 스티븐 머피(콜린 파렐)는 아내와 딸을 구하기 위해 아들을 죽인다. 누군가를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 결핍이나 억압에 꽁꽁 묶인다.


신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도 다르지 않다. 배경은 18세기 초 영국 왕실.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오랜 병치레로 몸이 쇠약하다.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에게 사실상 정치를 맡긴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이자 연인이다. "제닝스, 러시아 대사를 만날 준비가 됐어." "화장을 누가 해줬어요?" "드라마틱하게 해봤는데 어때?" "꼭 오소리 같아요. 지금 모습이 어떤지 볼래요?" "오소리 같네." "방에 가 계세요." 앤 여왕은 제닝스에게 늘 순종적이다. 그녀 앞에만 서면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천진난만해진다. 제닝스는 무심한 듯하지만 때때로 그녀의 아픈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이종길의 영화읽기]여왕과 두 여자 '권력 암투'...끝에는 차가운 외로움


앤 여왕은 비운의 군주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도록 고통을 받았다. 덴마크의 왕자 요르겐과 결혼해 열아홉 번 임신했으나 열네 번 유산했다. 두 명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나머지 세 명도 열 살까지 살지 못했다. 영화에서는 자식이 죽을 때마다 토끼를 산다. 토끼의 생일이 곧 자식들의 기일이다. 제닝스는 그 의미를 알면서도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토리당의 집권을 저지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녀의 하녀 애비게일 힐(엠마 스톤)은 빈틈을 절묘하게 파고든다. 어린 시절부터 토끼를 좋아했다며 앤 여왕에게 아첨한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됐어. 놀리지 마." "제가 남자였으면 열렬히 구애했을 거예요."


제닝스에게만 마음의 문을 여는 듯했던 앤 여왕은 조금씩 변해간다. 잠자리까지 함께 하면서 힐을 총애하기에 이른다. 쇠약한 군주에게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형국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앤 여왕은 두 여인과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정치력을 회복한다. 힐을 통해 결핍을 메우면서 잃어버린 정체성까지 되찾는다. 실제 역사는 앤 여왕이 양당 정치를 확립했다고 평가한다. 초기에는 토리당이 의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제닝스의 남편인 말버러 장군이 블레넘 전투에서 대승하면서 휘그당이 득세했다. 앤 여왕의 집권 후반기에 권력은 다시 토리당에게 넘어갔다. 국민들이 전쟁이 지쳐 있었고, 앤 여왕 또한 말버러 장군이 제2의 크롬웰이 될 것을 우려했다.


[이종길의 영화읽기]여왕과 두 여자 '권력 암투'...끝에는 차가운 외로움


란티모스 감독은 이 정치를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그려낸다. 남성 위주로 흘러온 역사와 정치를 비웃는다. 앤 여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권모술수로 아귀다툼한다. 의회 밖에서도 부정과 부패에 물들어 있다. 성추행을 일삼는가 하면, 오리들이 뒤뚱거리는 경주에 재물을 걸고 열광한다. 남성 배역들을 모두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페미니즘적이다. 힐은 그런 남성들을 유혹하다가 역으로 이용한다.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를 경험하며 생긴 생존 본능이다. 힐은 아버지의 도박 빚 때문에 귀족 신분을 잃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팔려가며 갖은 고생을 했다. 결핍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제닝스도 귀족의 탈이 벗겨지면서 창녀가 될 위기에 처한다. 그녀는 겨우 고비를 넘기면서 앤 여왕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앤 여왕의 곁에는 이미 신분 상승까지 이룬 힐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권력이 욕망의 대상이 될수록 첨예해지는 삼각관계는 막장드라마가 되기 쉽다. 하지만 란티모스 감독은 전작들처럼 사랑이나 우정이 결핍이나 억압에 묶여버리는 현상에 주목한다. 그 끝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외로움이 자리한다. 승자라고 할 수 있는 힐도 예외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한 듯하지만, 제닝스처럼 언제 초라한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 앤 여왕은 새로운 번민이 움트면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깨달았을 거다. 삶이 결코 어떤 경우에도 결핍이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이해와 여전한 결핍을 자각하는 순간 인생은 바뀔 수 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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