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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흑금성과 북한 여종업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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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정완주 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제71회 칸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윤종빈 감독의 영화 '공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칸 현지의 반응이 뜨거웠다는 소식이다.


이 영화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실존하는 거물급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시기도 절묘하다. '공작'은 남북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개봉을 앞둔 시기는 공교롭게도 극적인 남북 데탕트 시대가 열리고 있는 때다.

'공작'은 암호명 '흑금성'으로 불린 국가안전기획부의 스파이를 그린 첩보 스릴러물이다. 흑금성은 1997년 안기부 주도의 '북풍(北風)' 공작 사건에 연루된 실제 인물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주목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공작'을 제목으로 정한 과정도 첩보전을 방불케 해 화제다. 박근혜 정부의 영화인 블랙리스트를 의식해 원래 제목인 '흑금성' 대신 가제인 '공작'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흑금성을 다루는 영화가 제작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공작'으로 제목이 굳어졌다니 한편의 블랙코미디다.

영화 '공작'이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시기에 대한민국에는 '공작 2' 소재가 되고도 남을 뉴스가 지면을 장식했다. 이른바 '북한 여종업원들의 기획탈북' 의혹 사건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6년 4월 중국 저장(浙江)성의 류경식당에서 일하던 북한 국적 여종업원 12명이 지배인과 함께 집단 탈북해 국내로 입국했다고 발표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딱 엿새 앞둔 시점이었다. 그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을 통해 기획 탈북 의혹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한동안 묻혀 가던 이 사건은 종합편성채널 JTBC의 최근 탐사보도를 통해 당시 지배인이 육성으로 기획 탈북을 증언하면서 논란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정부는 신중하고 조심스런 입장을 유지했다. 사건의 전모가 파헤쳐질 경우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탓이다.


기획 탈북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지난 정부의 또 다른 적폐로 끝날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북한을 향해 우월적 입장에서 요구했던 인권 문제의 덫에 우리 스스로 걸려 든 셈이기 때문이다. 인권 유린에 납치, 정보기관의 총선 개입용 북풍 조작 등의 이슈가 줄줄이 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지뢰를 밟은 격이다.


이 의혹에 대한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와는 상관이 없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민변은 기획 탈북을 주도한 혐의로 이병호 전 국가정보원장과 홍용표 전 통일부 장관 등을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에 배당했다. 검찰의 엄정하고도 신속한 수사를 촉구한다.


아울러 정부도 검찰의 수사와는 별개로 자체 진상조사를 벌여 국민 앞에 낱낱이 전말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적나라한 우리 내부의 민낯이 드러나도 거쳐야할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잘못이 밝혀지면 국민과 당사자들에게 고개를 숙여 용서를 빌어야 한다.


분단 시대를 다룬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소설가 최인훈의 '광장'. 남과 북 어디서도 정착하지 못한 주인공 이명준은 제3국으로 가던 배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 극단적 이데올로기들이 충돌하는 현실 세계에서 그가 추구한 진정한 광장을 찾지 못한 채 말이다.


최인훈은 분단의 시대를 고뇌하면서 경계선에 선 사람들을 회색인이라 불렀다. 그의 소설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은 이명준의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수많은 이명준과 독고준을 낳았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우리가 또 다른 이명준을 낳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정완주 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wjchu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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