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완주 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지난해 5월 대통령 선거를 닷새 앞둔 시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아시아판은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얼굴을 표지에 실었다. 표지 제목은 '협상가'였다.
표지 사진을 본 많은 사람들은 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인권 수호자' '민주주의 신봉자' '노무현의 후계자' 등의 제목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문재인 후보와 협상가의 이미지는 좀처럼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커버스토리 문구는 '협상가 문재인, 김정은을 다룰 수 있는 남한의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라고 적혔다. 당시 북한의 이어지는 핵ㆍ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정세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이어서 더욱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생뚱맞은 장면은 두 달 후에도 이어졌다. 문 대통령은 7월 독일 쾨르버 재단 초청강연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북핵 위기가 더 고조되는 시점이었다.
당장 야당의 반발이 이어졌다. 보수야당은 '위험한 안보관'이라고 비난하면서 베를린 선언의 폐기를 촉구했다.
북한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첫 반응을 보인 노동신문은 베를린 선언에 대해 "잠꼬대 같은 궤변"이라고 일갈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HADㆍ사드) 배치로 한국과 갈등 관계에 놓인 중국 역시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베를린 선언을 놓고 "단지 공상에 그칠 것"이라고 폄훼했다.
베를린 선언 이후 불과 5개월이 지난 후부터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남북 정상회담, 북ㆍ미 정상회담, 북ㆍ일 정상회담, 남ㆍ북ㆍ미 정상회담 제안 등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내로라하는 외교ㆍ안보 전문가들은 거의 정신줄을 놓기 직전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반도 데탕트는 이제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기대감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문 대통령이 기존의 햇볕정책과 다른 방식의 접근법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점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문 대통령은 우선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관계 유지를 대북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모든 공을 쏟았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트럼프 대통령의 공으로 돌리는 '로키 외교'를 선보였다. 주요 외신들은 신중하고 현명한 외교라고 평가했다.
북한을 향한 성급한 퍼주기식 접근법은 피했다. 지금은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할 때가 아니라는 상황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비핵화 조치 전까지 '압박과 관여'가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도 계속 강조했다. 또한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비핵화가 같이 가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확실하게 밝혔다.
유럽 최초로 한국석좌에 위촉된 라몬 파첸코 파르도 브뤼셀자유대학 교수가 이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새로운 햇볕정책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정리하면 기존 햇볕정책에 '보수의 옷'을 덧입혔다고 할 수 있다. 북한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기조를 유지하되 보수적 관점의 접근법을 택한 문 대통령의 로드맵이 지금까지는 빛을 발휘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는 이를 '도박'이라고 표현했다. 도박이 실패할 경우 문 대통령이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새로운 햇볕정책을 앞세운 문 대통령의 도박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현재 예측하기 어렵다. 누구도 밟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이다. 험난하고 지루한 여정은 지금부터다. 미리 초를 칠 일도 아니지만 섣부른 낙관도 금물이다.
정완주 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wjchu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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