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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때문에 사람을 짐승처럼 패대기 치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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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9주기 망루 생존자 천주석씨 인터뷰

"욕심때문에 사람을 짐승처럼 패대기 치던 그날..." 천주석씨가 당시 사고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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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시 용산4구역 재개발 보상 대책에 반발해온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이 적정한 보상을 요구하며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 올랐다.

경찰의 진압작전 직후 망루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참사 현장으로 변하는 건 찰나였다.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숨졌다.
사고 20여일 후 검찰은 철거민 20명과 용역업체 직원 7명을 기소했다. 같은 해 10월 법원은 망루 생존 철거민 전원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렸다.


9년이 지난 지금 그 자리엔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사라진 참사 현장을 다시 찾은 망루 생존자 천주석(55)씨는 아시아경제와 만나 그날 이후의 기억을 '술'과 '응어리'라는 단어로 요약했다.

상도4동 철거주민인 천씨는 그날 시위를 지원하러 나갔다가 망루에 올랐다. 망루가 불에 탈 때 기절했다. 잔해 속에서 기적적으로 소방관과 경찰들에게 구조됐다. 얼굴이 함몰되고 다리는 골절됐다. 여러 번의 수술과 치료로 육신의 상처가 아물 때쯤 징역 4년형을 받고 법정구속돼 대구교도소에 수감됐다.


"달랠 게 술밖에 없었어요. 당시에도 술을 많이 마셨어요. 안 잊히죠. 참사 날짜가 다가오면 자꾸 생각이 나고, 가슴속에 응어리가 있어요. 응어리가 다 차지하는 것 같아요."


당시 천씨는 조그맣게 장갑공장을 했다. 참사 이후 구속되면서 공장은 문을 닫았다. 아내가 생계를 도맡았다. 9년의 세월 동안 20대 초반의 아이들은 30대가 됐다. 중소기업에 다니던 아이는 최근 실직자가 됐다. 천씨는 "중요한 시기에 제대로 뒷바라지도 못 했다"며 "가족에게는 죄인"이라고 했다.


이명박 정권 말이던 2013년 1월 말 형기 3년3개월을 채워가던 천씨는 사면됐다. 논란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특사 카드를 꺼내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을 사면하던 때였다. '끼워넣기' 사면에 대한 반발로 천씨는 사면장을 찢어버렸다. 올해 신년 사면에서 그는 용산참사 관련자 25명과 함께 재차 사면ㆍ복권됐다.


"죽은 사람들에게 사면장이 왜 필요한가요. 이미 땅에 묻혔는데…. 사면장은 쓸데도 없고 필요도 없어요. 진상을 규명해 낱낱이 밝히는 게 우선이에요."


상도4동 11개발구역 재개발 반대 운동을 하는 천씨는 "과거 정부 때보다는 사정이 나은 것 같다"고 했다. 천씨는 "강제적인 철거를 하지 않겠다는 박원순 서울시장 명의의 성명서도 받았다"며 "대화로 풀려고 노력하고 서로 타협하는 게 좋은 것"이라고 했다.


천씨가 꼽은 용산참사의 원인은 '돈'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적게 들여 많이 가져가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겨요. 강자들은 양보를 안 합니다. 대화를 하기도 전에 용역을 넣고 사람들을 못살게 하죠." 천씨는 "욕심 때문에 사람을 패고 짐승처럼 패대기쳤다"며 "사람을 사람답게 대해줘야 한다"고 울음을 참는 듯 웅얼거렸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하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그날엔 현장을 진압하던 경찰관 1명도 숨졌다. "가끔 생각해요. 어디서 죽었지? 죽은 경찰관한테는 너무 죄송한데, 우리 사람들(철거민)도 어디서 죽었는지 몰라요." 9년 전 참사에서 용산 철거민들과 경찰이 숨졌다. 천씨의 표현대로라면 둘 다 돈과 욕심,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권력의 피해자다.




김민진 기자 enter@asiae.co.kr
이기민 수습기자 victor.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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