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이종길의 영화읽기]日 애니 反戰, 자기비판과 은폐 사이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29초

가타부치 스나오 감독 '이 세상의 한구석에'

[이종길의 영화읽기]日 애니 反戰, 자기비판과 은폐 사이 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 스틸 컷
AD


美 공습으로 오른손 잃은 女주인공...전쟁 피해 그리며 日 폭력 부각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시간ㆍ공간적으로 日 이미지 지워 보편적 가치에 집중
'반딧불이의 묘' 반전영화로 수용되나 고도 소비 日에 던진 의미심장한 메시지

라디오에서 일왕의 '옥음(玉音)'이 흘러나온다. "맡은 일로 목숨을 바치고 비명(非命)에 간 자들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이 찢어질 듯하다." 마루에 무릎을 꿇고 경청하던 여인들은 조국의 패전을 직감한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가장 소심하고 세상 물정 어두운 스즈를 제외하고.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그런 건 다 각오했던 거 아니에요? 마지막 한 명까지 싸우기로 한 거 아니에요? 아직 왼손도, 두 다리도 남아 있는데." 그녀는 뒷산으로 올라가 목 놓아 통곡한다. "떠나가 버린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그거면 된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그러니 견뎌야 한다고 믿었던 이유들이."


가타부치 스나오 감독(57)의 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에서 일본인은 피해자다. 전쟁과 무관한 여자. 갑작스레 들어온 혼담을 받아들여 고향인 히로시마에서 멀지 않은 쿠레로 시집가 묵묵히 살림을 배운다. 유일한 낙은 그림 그리기. 하지만 미군의 공습으로 오른손을 잃는다. 이쯤 되면 '피해의 신화' 같다. 일본에서 작동되는 집단적 규모의 자기 방어 메커니즘으로, 일본인이 패전을 계기로 적군이나 식민지 강점의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기록해 유포한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를 간단하게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이종길의 영화읽기]日 애니 反戰, 자기비판과 은폐 사이 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 스틸 컷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를 확대 및 재생산하는데 기여했다. 데즈카 오사무 감독의 '아톰' 시리즈만 해도 로봇의 아이콘을 통해 일본인을 미국 백인에게 착취당하는 흑인 노예와 중첩시켰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76)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에서는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로마 제국의 압정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 혹은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을 연상케 한다. 수려한 영상과 어우러져 동시대 희생자들을 외면한 나르시스의 눈물을 촉발한다. 전쟁에서의 패배를 미래 시제에서 상상적 승리로 대체해 쾌감을 전하는 영화들도 있다. 1970년대에 인기를 끈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욕망의 해소를 위해 서사 안에서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이를 주어진 현실로서 긍정하게 한다.


이런 작품들에서 영웅 찬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고발이나 일본인의 희생이 부각된다. 자국민의 감성을 자극해 피해의식을 키운다. 또 제국주의를 은폐하고 반미를 조장한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 같은 논쟁에서 벗어나려고 시간ㆍ공간적으로 일본의 이미지를 지워버렸다. 보편적 가치에 집중해 누구나 마음 편하게 수용하도록 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은 알고 보면 '미래소년 코난(1978년)'처럼 미래의 어떤 전쟁이 아닌 과거 태평양전쟁이다. '부해'로 불리는 독기를 뿜는 균류의 숲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원자폭탄이 처음 투하된 일본을 가리킨다. 미야자키 감독은 나우시카의 비장한 얼굴을 통해 전후 일본의 국가적 기원이 된 원폭의 유산 혹은 상흔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운명을 걱정한다. 원죄 의식 위에서 어떻게 했더라면 전쟁 중의 참화로부터 삶을 구원할 수 있었을지 과거 완료 시제의 가정법으로 고민한다. 배경을 1945년 일본으로 그릴 수도 있었겠으나, 일본이 가해자로 위치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는 쉽지 않았을 게다.


[이종길의 영화읽기]日 애니 反戰, 자기비판과 은폐 사이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스틸 컷


나우시카는 클라이맥스에서 원자폭탄을 닮은 토르메키아 군대의 거신병으로부터 마을 사람들과 오무(곤충류)의 대군을 모두 구한다. 기독교적 메시아 신앙이다. 나우시카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 바람계곡을 2000여 년 전 예루살렘과 요한계시록 속 심판의 날로 돌려보낸다. 구원을 요청하게 만드는 현실의 모든 재난, 즉 역사의 불행을 운명으로 묶어버린다. 대체로 이런 시도는 어떤 불행한 사건이 논리적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경우 또는 이를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 죄의식과 책임을 덮어버리려는 경우에 나타난다. 모두 미래를 과거의 연장으로 만들면서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미야자키 감독은 훗날 "영화를 완성하고 보니 내가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종교적 영역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각하게 궁지에 몰렸다"고 했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82)은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반전영화에 회의적이었다. "공습과 원폭 투하로 초래되는 전쟁의 비극을 감정적으로 극화하는 것은 현재와 잘 연결되지도 않을뿐더러 일본이 다른 나라에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반딧불이의 묘(1988년)'는 반전영화로 수용됐다. 미군의 공습으로 집과 어머니를 잃은 세이타ㆍ세츠코 남매가 전쟁의 참화와 세상의 비정함 속에 소멸되는 과정을 담아 피해의 신화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종길의 영화읽기]日 애니 反戰, 자기비판과 은폐 사이 영화 '반딧불이의 묘' 스틸 컷


다카하타 감독은 일본을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았다. 극한 상황으로 자기보존의 욕구가 팽창해 무관심과 무감정이 극에 달한 사회를 묘사하는데 더 무게를 뒀다. 남매는 아버지가 순양함의 함장인 중상류층이다. 당시 구하기도 어려운 버터와 사탕을 한가득 안고 시골 친척집으로 피난한다. 대부분이 어렵게 사는 전쟁 중에 나름대로 호의호식한다. 그래서 친척 아주머니와의 마찰이 콩쥐팥쥐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데도 불가피한 마찰로 다가온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남매는 제국주의 시절 군인 지배계급의 무능을 상징한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도시적 생활방식이 유리걸식을 넘어 고립과 죽음으로 연결된다. 남매의 유령은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고 40년 넘게 이승을 떠돈다. 이는 영화가 제작될 당시 고도 소비사회였던 일본에 던진 의미심장한 메시지다. 물질적 풍요에 익숙하나 제대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종길의 영화읽기]日 애니 反戰, 자기비판과 은폐 사이 영화 '반딧불이의 묘' 스틸 컷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이 같은 비판의 연장선이 있다. 스즈가 목 놓아 통곡할 때 마을의 한 집에서 태극기를 게양한다. 눈물방울은 더 굵어진다. "바다 건너에서 온 쌀, 콩, 내 몸은 그런 것들로 이뤄져 있지. 그러니까 폭력에 굴복하게 되는 건가?" 일본이 조선을 폭력으로 침략했고, 더 강력한 힘을 지닌 미국에 굴복하게 됐음을 스즈가 깨닫는 대목. 시댁 식구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는 게 존재의 이유였던 그녀의 정체성은 뿌리째 흔들린다. 가타부치 감독은 스즈와 오늘날 일본인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듯하다. 민족적 책임과 자각이 여전히 회피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정부는 역사 왜곡을 넘어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듯한 자세까지 보인다. 그렇다고 폭력으로 점철된 가해국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 있어도 언젠가 드러날 일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