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수능과 과거시험]①수능은 '개인전'인데 왜 과거는 '단체전'이라 불렸을까?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12초

[수능과 과거시험]①수능은 '개인전'인데 왜 과거는 '단체전'이라 불렸을까?
AD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포항지진으로 일주일간 미뤄졌던 수능시험이 23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올해 수능시험 응시자는 59만3000여명으로 전국 1180개 시험장에서 일제히 치러진다. 수험생들 입장에서 수능은 흔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 불린다. 수험생 1명이 자신에게 주어진 수험표와 OMR카드, 펜 한자루를 놓고 벌어지는 철저한 '개인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능시험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과거(科擧)시험은 원칙적으론 수능과 마찬가지의 개인전이었지만 실제론 '단체전' 성격의 시험이었다. 도무지 혼자 볼래야 볼 수가 없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게 시험을 볼 '자리'를 잡는 일이었는데 여기서부터 피튀기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좋은 자리고 뭐고 이전에 자리 자체가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시험은 보통 각 지역에서 보는 소과 초시부터 시작해 소과 복시, 대과 초시, 대과 복시, 대과 전시까지 5단계로 구성된 시험이었다. 이중 소과 초시에 응시하는 사람은 보통 10~15만명 수준으로 서울에서 보던 한성시와 지방에서 보는 향시로 나뉘었는데, 지방 향시도 한 시험장 당 1만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수능과 과거시험]①수능은 '개인전'인데 왜 과거는 '단체전'이라 불렸을까?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 '소과응시' 모습. 서로서로 모여 의논해 답을 내고 분업화 돼있던 과거시험장 모습을 잘 표현했다.(사진=문화재청)


1만명이 몰려들어도 이중 제대로 채점되는 인원은 고작 300여명. 이는 과거시험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당일 본 시험은 반드시 당일 채점을 마치고 합격자를 선발해야한다는 '즉일방방(卽日放榜)'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300장이 일단 들어오면 대체로 그 안에서 심사위원들이 선발하려했고 결국 1만명 중 3%만이 제대로 채점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서로 빨리 자리를 잡아 앉으려고 난리가 나곤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난장(亂場)'이란 단어였고 우리가 지금 '난장판이 됐다'고 할때 쓰는 그 난장판의 어원이 됐다. 이런 상황이니 자리를 미리 잡아주는 대행서비스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런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들을 일컬어 '선접(先接)꾼'이라 불렸다. 자리다툼을 하다 맞아죽거나 깔려죽는 선접꾼도 많았기 때문에 선접꾼은 보통 조선시대 목숨을 건 아르바이트로 불렸으며 명문 대갓집의 경우엔 수십~수백명의 선접꾼을 고용해서 미리 여러 자리를 독식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과거시험 응시자가 점점 늘어나 18세기 이후부터는 수십만명에 이르게 되자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시험은 단체전을 넘어 '길드전' 성격을 띄게 됐다. 자리를 맡는 선접꾼 외에도 문제를 빨리 풀어 응시자에게 알려주는 '거벽(巨擘)', 서예 솜씨가 뛰어나 거벽이 가져온 답안을 답안지에 옮겨쓰는 '사수(寫手)' 등 분업화가 이뤄졌다. 돈있는 권세가의 자손들이 이런 팀플레이로 합격하기 시작하자 일반 사람들도 아예 팀을 이루고 분업을 해서 과거를 보는 일이 횡행했다.


이런 부정행위가 만연했어도, 고려시대 이후 조선왕조로 이어질 때까지 무려 1000년 가까이 본 이 시험에서 부정합격이 일어나긴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4차 시험인 대과 복시에 합격한 33명만 임용이 됐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마지막 5차 시험인 대과 전시의 경우엔 왕 앞에서 왕이 묻는 질문에 대답해야하는 면접시험을 봐야했기 때문에 단순히 다른사람 머리를 빌려 올라온 사람들은 한계가 있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