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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아름다운 공감 남기고 떠난 전미선
최종수정 2019.07.18 13:29기사입력 2019.07.18 13:29

오랜 조연으로 다져진 연기력, '8월의 크리스마스'·'마더' 등 열연
유작 '나랏말싸미' 능동적인 소헌왕후役…세심한 배려 속 인간미 닮아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예요? 백성들은 더 이상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아요."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소헌왕후가 세종대왕(송강호)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신미 스님(박해일)을 다시 불러들이자는 청. 억불 정책을 내세우는 유자(儒者)들 앞에서 주눅 들지 말라는 독려이기도 하다. 배우 전미선이 촬영을 앞두고 직접 지었다. 소헌왕후를 연기하면서 평상시에 하고 싶었던 말, 내뱉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었단다. 이 대사도 다르지 않았을 거다. 같은 세대 여성들이 큰소리를 내고 살기 어려웠을 테니. 그녀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에서 세종대왕 이상으로 강단 있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세심한 배려를 더해 따스한 인간미를 전한다. 생전 자주 그린 맑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전미선은 온기가 흐르는 연기에 탁월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지원에서 출발한 것 같다. 정원(한석규)의 옛사랑. 다른 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키운다. 정원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초원사진관을 찾는다. "오빠는 이 동네에서 20년 넘게 지냈는데 지겹지도 않아?" "에이, 모르겠어." "왜 아직 결혼 안 했어?" "너 기다리느라고." (중략) "오빠 많이 아프다면서." "아니야. 나, 멀쩡해." "심각해?" "멀쩡해." 멋쩍은 듯 어색한 미소를 띠는 지원. 소파에 기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한다. 순수한 걱정이다. 정원이 막 닦은 유리창에 얼룩으로 남는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그녀의 근심 어린 눈은 상대를 향하지 않았다. '번지점프를 하다' 속 인우(이병헌)의 아내처럼. 화장대 앞에 앉아 한참 동안 바닥 한곳을 응시한다. 남편의 입에서 나올 진실을 두려워한다. 조용히 물을뿐이다. "당신, 동성연애자였어?" "아니?" "그럼?" "한 사람만 사랑해." "그런데 그 한 사람이 하필이면 열일곱 살 먹은 남자 제자야?" "아니, 태희." 그제서야 인우를 바라보는 아내. 배신감에 사로잡혀 따져 묻는다. "누구? 태희? 당신 미쳤구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전미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 말도 없는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상충되는 이해관계에 슬퍼하는 얼굴을.




전미선은 스크린에서 가녀린 나무 같았다. 척박한 땅에 뿌리가 박히고도 나붓나붓한 잎사귀로 위로를 건넸다. '마더' 속 미선도 그런 여인이다. 도준 어머니(김혜자)의 유일한 말벗. 엉덩이에 침을 맞으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이 나와도 정다운 얼굴이다. "얼마나요?" "급하게 좀 필요해서. 대신 내가 약 지어줄게. 이자 대신." "약이요?" "그래, 아기 들어서는 약. 최고로 신통할 걸로." "정말 그런 약이 있어요?" "진짜 효과 있어. 나도 그 약 지어먹고 나서 우리 도준이 가졌잖아. 자기도 그러면 미남 아들 생겨." 미선은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 "도준이는요. 눈이 진짜 예술이야. 사슴 같아요." 도준(원빈)이 앞가림을 못 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실낱같은 희망 하나로 험한 세상을 버티어 왔으니.

전미선에게는 연기가 그랬다. 쉬지 않고 할수록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녀는 지난달 25일 씨네21을 만나 "(연기를) 안 하면 무기력해진다. 연기 실력 역시 하면 할수록 느는 측면이 있어서 스스로 자신감도 조금씩 얻었다"라고 했다. "연극은 관객과 직접 소통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치유받는 부분이 많다. 영화는 내가 할 수 있는 연기를 최대치로 표현할 수 있는 시공간이 허락되어서 좋다. 드라마는 인간 전미선의 긴장이 부족할 때 내게 기를 막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배역의 크기는 상관없었다. 한두 신에 불과해도 깊은 사연을 불어넣었다. 함축적인 표현에 능수능란했다. 오랜 조연 생활로 터득한 내공이다. 청아한 얼굴로 깊은 공감마저 유도해 오래 기억됐다. 뜻하지 않은 죽음에 대중이 슬퍼하고 애도하는 이유다. 그녀는 뜨거운 응원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사랑에 서툴렀던 '연애'의 어진과 같이. 어디선가 외롭게 '외로운 가로등'을 부르고 있을 듯하다. "비 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울리고 떠나간 그 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밤도 깊은 이 거리에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 마음속을 너마저 울려 주느냐."


전미선은 스스로를 다스리기 전에 남을 위했다. 세월호 참사 유족의 삶을 다룬 '봄이 가도' 출연 제의에도 선뜻 응했다. 작은 불씨가 되어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어 했다. "저 역시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어요. 한때는 그 계절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기억을 되뇌고 있더라고요. 남겨진 사람들이 슬픔을 마주하는 시기는 저마다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저 역시 세월호 사고 뒤 남겨진 가족들의 얘기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배려심 깊은 마음은 '살인의 추억'에서 연기한 곽설영과 닮았다. 연쇄 살인사건 범인을 쫓는 박두만(송강호)을 끊임없이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왜 이런데 사람을 나오라고 그래." "왜? 나는 좀 불러내면 안 돼? 어휴. 얼굴은 까칠해가지고. 잠은 제때 자?" "잠을 제때 자는 형사가 어디 있냐?" 온갖 짜증에도 눈빛은 여전히 걱정스럽다. "진짜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이건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뭐 다른 거 할 거 없어? 형사 그만하면 안돼?"


유작이 된 나랏말싸미에서도 위로와 조언은 계속된다. 소헌왕후는 세종대왕의 몸을 씻겨 준다. 궁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보드라운 손길로 등을 문지른다. "아, 아픕니다. 아파요. 아파요." "아이 엄살 좀 그만 부려요. 당신이 열두 살, 내가 열네 살인 그때도 그리 씻기를 싫어하더니." "그때가 좋았어. 당신이 곁에 있으면 책을 봐도 좋고 밥을 먹어도 좋고, 뭘 해도 좋았지." "신미 스님이 그럽디다. 장작과 걱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가 같다고. 장작은 죽은 사람의 몸을 태우고, 걱정은 산 사람의 마음을 태우기 때문이라네요." 그곳에서는 장작과 걱정 없이 편히 쉬시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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