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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 한쪽으로만 꼬인 DNA의 법칙…자연의 암호를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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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신약' 존재할까

[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 한쪽으로만 꼬인 DNA의 법칙…자연의 암호를 풀어라 김병민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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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을 방문하면 많은 이름의 약과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이미 익숙한 이름이 있고 처음 보는 화학물질 이름도 있습니다. 화학을 공부한 저도 모르는 이름이 많은데 대다수 사람은 무척 생소하고 어렵게 느끼겠다 싶습니다. 제약사들도 약 이름을 짓는 데 애 먹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베나치오' 같은 약은 이름만 들어도 어떤 증상에 필요한 것인지 연상됩니다. 그래서 작명 의도에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제약사는 약의 성분을 암호처럼 숨기거나 성분이 바로 연상되도록 명명합니다. 일례로 아스피린(Aspirin)의 A는 '아세틸'의 앞자이고 spir는 '살리실산' 같은 조팝나무산(spiraeic acid)을 의미합니다. 아스피린의 주성분은 '아세틸살리실산'입니다. 해열·진통·소염 효과로 잘 알려진 '이부프로펜'은 약물 화학명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경우입니다. 시럽 형태인 부루펜도 성분이 같죠. 약 물질인 이부프로펜(Ibuprofen)은 유기화합물의 화학명입니다.


그런데 약국 진열대의 건강보조제에 이런 명명 형식을 가진 다소 생소한 이름의 약물이 있더군요. 분명 우리 몸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이름인데, 이름 앞에 로마자 알파벳인 'L'이 접두어처럼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L-아르기닌'이라는 물질을 그대로 상표로 사용한 겁니다.


이 글에서 제가 특정 상품명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것도 이름이 일반적인 화학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L이라는 용어는 아르기닌에만 사용할까요. 사실 이는 이부프로펜에도, 대다수 유기화합물에도 적용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화학물질을 단순히 구분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죠. 예를 들어 이부프로펜에는 L-이부프로펜과 D-이부프로펜이라는 두 성분이 같은 양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해열과 진통 효과를 내는 물질은 D-이부프로펜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요?


두 물질의 화학적 구성 원소는 같습니다. 원소의 종류와 개수가 같지만 결합 방식은 달라 다른 성질을 지닌 물질이 있지요. 화학에서는 이런 물질을 이성질체(異性質體·isomer)라고 부릅니다.


이성질체 가운데는 원자 간 결합 방식마저 같은 '입체 이성질체'가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일란성 쌍둥이처럼 비슷하죠. 하지만 자세히 보면 배열이 다른 물질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입체상 좌우가 바뀐 모습이죠.

[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 한쪽으로만 꼬인 DNA의 법칙…자연의 암호를 풀어라

아스피린의 'A' 아세틸의 앞글자
이부프로펜 L·D 성분 구성요소 같지만
화학적 결합 방식 다른 이성질체
닮았지만 배열이 다른 일란성 쌍둥이
자연 속엔 카이랄성 물질 하나만 존재
DNA 나선의 비밀, 아직도 이유 몰라

우리는 거울에서 자기와 닮은 모습을 보지만 사실 좌우가 바뀐 모습입니다. 이 분자는 서로 겹쳐지지 않습니다. 왼손 장갑에 오른손이 들어가지 않는 거죠. 이를 화학에서는 거울상 이성질체 혹은 카이랄성(Chirality) 분자라고 부릅니다. '카이랄'은 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됐습니다. 우리 양손이 좌우가 바뀌어 서로 겹쳐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따온 말입니다. 여기서 L과 D는 라틴어 레보(Levo)·덱스트로(Dextro)의 약자로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두 물질은 물리ㆍ화학적 성질이 매우 비슷합니다. 그래서 구분이 잘 안 되고 분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물질이 약제로 우리 몸에 들어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L-이부프로펜의 경우 속이 쓰리거나 간에 부담을 주니까요.


인공 유기화합물 대다수는 이런 거울상 이성질체가 둘 다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약제도 예외는 없겠죠. 대다수의 약물은 우리 몸의 효소와 맞물려 그 반응으로 약효가 나타납니다. 열쇠와 자물쇠처럼 서로 결합이 잘 맞는 구조여야 효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부프로펜의 경우 오른쪽 거울상 이성질체에 약효가 있는 거죠. 그래서 불필요한 이성질체는 걸러내고 약효가 있는 D-이부프로펜만 추출해 약을 만들기도 합니다. 덱시부프로펜(Dexibuprofen)은 이부프로펜보다 절반의 양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고 부작용이 없는 거죠.


신기한 것은 인공물질이 아닌 자연물질의 경우 카이랄성물질 하나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반대의 거울 이성질체는 만들지 않습니다. 결국 약효가 있는 이성질체의 다른 쪽 물질은 약효가 없거나 독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죠.


DNA를 보면 나선 모양처럼 한쪽으로만 꼬여 있습니다. 이는 DNA를 이루는 당물질도 한쪽 카이랄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신비하고 감동적이지만 인류는 아직도 자연이 왜 한쪽만 만드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이에 대해 몰랐던 인류는 현대의학 역사상 최악의 사건을 만듭니다. 1959년 독일 제약회사 그뤼넨탈은 진정제의 일종인 '탈리도마이드'를 만듭니다. 탈리도마이드는 동물시험과 임상시험에서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기적의 약물로 불리며 유럽에 급속도로 퍼졌죠.


그뤼넨탈은 거대한 미국 제약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승인을 신청했습니다. 당시 심사관은 미국의 약리학자 프랜시스 올덤 켈시(1914~2015)였습니다.


켈시는 15세에 대학을 들어간 수재였습니다. 그는 연구직을 거쳐 FDA에 합류했죠. 그가 맡은 첫 승인 심사 업무는 독일 기업이 신청한 탈리도마이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약사의 실험자료가 미비한 데다 임신부들이 복용할 경우 태아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검토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인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약을 거절한 켈시는 제약사의 손해배상 청구에다 각종 협박과 비난까지 견뎌내야 했습니다. FDA 내에서도 질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가 FDA에 들어갈 당시 여성 연구원을 잘 뽑지 않는 게 FDA의 분위기였습니다. 상사가 그의 이름만 보고 남성으로 착각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켈시가 겪었을 고통은 짐작할 만합니다. 그가 1년이 넘도록 6번이나 승인을 거절하는 사이 탈리도마이드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한 알만 먹어도 기형아가 태어나는 약이었죠. 결국 독일에서만 한 해 동안 약 1만2000명의 기형아가 태어나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탈리도마이드가 임신부의 입덧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입소문을 타고 급속히 퍼졌던 겁니다.


문제는 탈리도마이드의 분자구조에 있었죠. 한쪽 카이랄 분자에 입덧 완화 효과가 있었지만 다른 쪽 분자는 혈관 생성을 억제했던 겁니다. 결국 태아의 인체 말단 조직인 팔다리가 자랄 수 없었던 거죠. 당시 미국에서 17명의 기형아 출산으로 그친 건 과학적 원칙을 따른 켈시의 행동 덕이었습니다.

[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 한쪽으로만 꼬인 DNA의 법칙…자연의 암호를 풀어라

독일산 진정제 '탈리도마이드'
1년간 6번 승인 거절 FDA 켈시의 용기
한쪽 카이랄 분자서 심각한 부작용
코로나 백신·치료제는 문제 없기를

최근 들어 미국에서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 20만명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 보건복지부는 거대 제약사 두 곳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을 조만간 승인할 예정입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작과 동시에 백악관은 백신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했죠. 프로젝트 명이 '초고속 작전(Operation Warp Speed)'인 걸 보면 신약에 대한 유례없는 승인은 전혀 이상할 것 없습니다.


두 제약사는 허가 후 24시간 안에 백신을 보급할 준비까지 마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약 개발은 으레 오래 걸리기 마련입니다. 물론 백신은 치료제와 다릅니다. 그러나 신약이 승인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검증과 시험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거대 제약사의 발 빠른 횡보가 염려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미지의 영역에 발을 내딛는 것처럼 두렵습니다.


저 또한 백신이든 치료제든 부작용이 없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멈춘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가길 바랍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듭니다. 팬데믹이 잠잠해지려면 집단 면역 차원에서 충분한 인구가 백신을 접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신을 몇 차례 맞아야 효과가 있는지 아직 모릅니다. 우리에겐 아직 어떤 경험도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사회정의와 공공선이라는 면에서 백신 수혜는 공정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선진국에서 시작될 백신 접종이 또 다른 사회적 차별을 낳을 수 있다는 거죠.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코로나19가 풍토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풍토병은 언제 다시 변이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지 모릅니다.


백신의 등장은 분명 희망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모습을 사회적 정의와 함께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나 기적의 약을 바라겠지만 자연 아닌 인류가 만든 세상과 약에 기적은 없을 듯합니다. 약의 다른 얼굴은 독이고, 인류도 늘 두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한림대학교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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