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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사상 최다 각주’ 논문과 국민연금의 단기매매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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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사상 최다 각주’ 논문과 국민연금의 단기매매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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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본질은 연구이고 연구의 존재형식은 논문이다. 논문으로 이야기하고 논문에 목숨 거는 곳이 학계다. 그리고 이공계는 몰라도 많은 인문사회 분야에서 논문의 꽃이라면 각주다. 존 내쉬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천재들이 아닌 한 논문의 질과 저자의 내공은 각주 몇 개만 봐도 얼추 파악이 된다. 매 쪽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두툼하게 채워진 각주는 미처 읽기도 전에 옷깃을 여미며 경의를 표하게 한다. 호미, 괭이 들고 허리가 끊어져라 김을 맨 노고가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법학 분야에 사상 최다의 각주가 달린 논문이 있다. 기네스북에 논문 각주 카테고리가 없어서 등재되지는 못했다지만 어쨌든 세계 기록으로 보이는 각주 4824개의 이 논문은 미국의 저명한 증권법 변호사인 아놀드 제이콥스(Arnold S. Jacobs)가 1987년 '뉴욕 로스쿨 로 리뷰'라는 학술지에 발표한 것이다. 그 아들(Arnold J. Jacobs) 또한 비범한 이 유대인 변호사는 25권의 전문서와 많은 논문으로 연방대법원 판결문에도 자주 인용될 정도의 전문성을 자랑한다.


제이콥스의 이 논문은 491쪽에 걸쳐 미국 증권거래소법 제16조를 분석했는데, 이 조항은 우리 자본시장법 제172조와 제173조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공개법인의 주요주주ㆍ임원의 소유상황보고, 단기매매차익반환, 공매도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셋 다 내부자거래 방지를 위한 장치인데 이 중에서 단기매매차익반환제도가 논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사항이다. 내부자거래 규제의 엄격함과 복잡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해 3월 국민연금은 지분이 7.16%인 한진칼에 대해서는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면서 11.56%인 대한항공에 대해서는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포기했는데, 그 이유가 단기매매차익반환 문제였다. 즉 대한항공의 경우 보유 지분이 10%가 넘어 국민연금은 주요주주가 되고, 주요주주가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경영참여'를 하게 되면 6개월 내 거래로 발생하는 차익을 다 반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이 단기매매차익이 2016~2018년 3년간 469억원이었다. 경영참여를 하지 않고 '단순투자' 상태를 유지하면 단기매매차익 반환이 면제된다.


국민연금의 단기매매차익반환이 면제된 것은 2012년에 금융위원회 규정을 통해 공무원연금ㆍ사학연금과 더불어 경영관여 없는 '단순투자'임을 전제로 처음으로 인정됐는데 이들의 공적 성격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년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른 주주권 행사 지침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올해부터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다보니 이 단기매매차익반환제도와 5% 보고제도가 걸림돌이 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해 2월에 5% 보고제도에 관한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개정해 '경영참여'와 '단순투자' 사이에 '일반투자'라는 항목을 신설함으로써 연기금 등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허용했다. 그리고 금융위원회도 단기매매차익반환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국민연금 등 3대 공적 연기금이 '일반투자' 목적일 경우에도 단기매매차익반환의무의 면제를 인정했다.


약 100개 상장법인의 주요주주인 국민연금은 이제 상당한 폭의 경영개입을 하면서도 빈번한 단기매매를 할 수 있게 됐는데 이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기업의 지배구조 등의 개선으로 중장기적 가치를 제고한다는 스튜어드십 코드와 단기차익을 추구하는 단기매매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점이다. 둘째, 직접 운용이든 위탁 운용이든 다 수익률에 성과급이나 인센티브가 연동돼 있는 상황에서, 단기매매에 제한이 없으면 적극적 주주활동 과정에서 취득한 내부정보를 이용할 위험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라 경영 관여를 하는 것도 논란이 많은 상황에서 단기매매는 확실히 지양될 필요가 있다.



성희활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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