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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조주빈을 만든 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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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범죄로서 가장 오래된 기억은 1998년이 배경이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죄질이 더 나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국 남성들은 미스코리아 출신의 여배우와 유명 가수가 등장한 그 비디오를 별다른 죄의식 없이 돌려봤다. 피해자의 인생이 망가지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럴 만한 일을 저질렀다'며 당연시하는 풍조도 만연했다. 이 같은 세태는 한국 사회가 비디오 제작자도 유포자도 관람자도 아닌 두 명의 피해자에게 '생업을 그만두고 대중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징벌을 가한 것으로 구체화됐다.


해당 사건은 가해자의 인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 명은 사건 이후 생긴 인지도를 이용해 방송·출판 등 영역으로 진출했다. 비디오 유포의 직접 책임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은 받지 않았다. 두 번째 가해자는 사건 발생 8년이 지나 법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심판이 한 인격을 파괴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가한 행위에 대한 단죄가 아니었음은, 그에게 적용된 법률의 이름과 형량이 말해준다. 전기통신기본법과 음란물건제조죄, 징역 4년. 그리고 비디오를 수소문하고 복사하며 유포했던 집단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았다거나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응징했던 우리 사회의 실책은 법률적 미비와 연관돼 있으며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디지털 영상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의 정도가 신체 접촉 성범죄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 법률은 나날이 진화하는 디지털 성범죄의 양상과 복잡한 형태의 가해 행위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이런 법률적 공백이 소라의 가이드와 웹하드 카르텔을 거쳐 정준영 카톡방과 n번방이라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건을 잉태하는 데 기여했음은 자명하다.


신체 접촉 성범죄의 폭력성은 기본적으로 그 행위를 저지른 가해자로부터 나온다. 반면 디지털 성범죄는 생산·유포뿐 아니라 영상에 접근한 클릭수 하나하나가 개별적 폭력 행위로 피해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1차 가해나 1만5000차 가해나 폭력성 정도에 차이는 없다.


성범죄를 처벌하는 대표적 법률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n번방이나 유사한 온라인 공간에서 불법 촬영물을 관람하거나 스마트폰에 저장한 이들에게 성폭력처벌법을 적용하는 데는 현실적 장벽이 있다. 이 법은 의사에 반해 촬영된 영상물이라도 피해자가 성인이라면 이를 단순 소지한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아동·청소년이라면 소지 행위도 처벌받지만,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불과하다. 아동·청소년 음란물이라도 단순 관람자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


명백한 성폭력을 행사한 사람을 비교적 가벼운 법으로 단죄하게 되는 현실은 불법 음란물 접근에 대한 죄의식을 희미하게 만든다.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는 채팅방에 1만5000명이라는 가해 집단이 있었다는 현실이 이를 방증하며, 이런 거대한 시장은 조주빈이라는 괴물을 이 사회에 반복해 던져줄 것이다.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과 종류를 정립하려는 법적 시도가 시작된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기존 법을 보완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디지털 성범죄에 특화된 별도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점점 더 파괴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를 제어할 적절한 법 체계를 마련하는 일은, 20여년 전 두 여성을 포함해 우리 공동체와 법률이 보듬어주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의 길이 될 것이다.

[시시비비] 조주빈을 만든 法 사회부장 신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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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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