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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내 안의 아이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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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내 안의 아이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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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예인의 때 이른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잊었다. 저녁 내내 일에 골몰하다가 소식을 좀 늦게 접했다.


"아, 그 예쁜 아이!" 절로 나온 첫 마디가 이즈음 교실에서는 쓰지 않기를 권하는 외모를 지칭하는 말이다.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 있나, 그저 신기하던 아이였다. 복숭아같이 발그레한 표정으로 늘 말을 몰고 다녔다. 대개는 비난이고 조롱이었다. 스물다섯은 제일 예쁜 나이, 어른-아이의 나이. 아이일 때부터 집을 떠나 연습생 생활을 오래 하다 십 대에 데뷔했기에 실상 아이로 살아본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그 어른-아이의 죽음 앞에서 많은 질문을 한다.


먼저 말에 관한 것. 말은 참 이상한 힘이 있다. '밉다' 하면 밉고 '예쁘다' 하면 예쁘고 '사랑스럽다' 하면 사랑스럽다. '착해' 하면 착해지고, '잘한다' 하면 없는 힘이 불쑥 생기는 말의 힘. 자살이라는 말이 너무 아파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우리는 에둘러 말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누구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자살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몰려서 당하는 일이다. 차마 어쩔 수 없어서 죽는다. 독화살처럼 와 꽂히는 혐오의 말과 아무 가책 없이 쉽게 던지는 조롱과 비방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을 절망하게 하고 죽음으로 내몬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죽음 앞에서 누구는 우울증을 원망하고, 누구는 악플을 원망한다. 누구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유린하는 이 사회의 풍조를 개탄한다. 청순하면서 섹시해야 하고, 누이처럼 친근하되 신비로워야 하고, 완벽한 퍼포먼스를 하되 인간미 있어야 하는 일. 나는 사실 그 아이를 잘 모른다.


재능보다는 요란한 기사로 소비되던 아이는 편견을 없애고 싶다 했다. "악플이 너무 많아서 한번쯤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라며 마지막으로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했다. 이 세상 독한 악플을 다 받아 견딜 수 있는 듯 털털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 너머엔 속울음과 어둠이 있었다. 속절없이 떠나고 나서야 우리는 한탄하고 반성하고 고백한다. 그러고는 곧 잊는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기에.


지나치듯 본 게 전부이지만 내 마음에 유난히 남는 말은, 어릴 때부터 줄곧 어른스러워야 했던 게 힘들었다는 그 아이의 고백이다. 누구나 아이를 지나 어른이 된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 안에는 아이가 산다. 상처받았던 아이. 세상 걱정 없이 즐거웠던 아이.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고, 선생이 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그 안에는 아이가 있다. 모든 생의 첫 날을 비로소 사는, 여전히 어설픈 아이다. 그 아이를 바라봐야 한다. 내 안의 아이를 품어주고 다독이고 거기서 생기를 끌어내야 한다. 이 지치고 남루한 어른들의 세계, 그 환멸과 절망의 세계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내 안의 아이를 품어야 한다.


"새벽꿈에 깨어 어린이로서 소년으로서 울었다". 한 시인의 시구절이다. 어른은 울지 않는 사람. 하지만 자라지 않는 아이 하나 안고 자다가 깨어서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땅강아지처럼 서러워서 운다. 힘센 어른이 아니라 서럽고 약한 내 안의 아이로 운다. 그 아이를 보자. 그 아이가 아프면 아프다 하자. 외로우면 외롭다 하자. 힘들면 아이처럼 생떼를 부리자. 내 마음 좀 봐달라고 울자. 열심히 살았고 당당했으나 내 안의 아이를 보살피지 못하고 속절없이 떠난 이. 진리라는 이름. 그를 기억한다.



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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