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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박용만 선생이 편찬한 군사교범 '군인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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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1905년부터 미국에서 독립운동…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등 창설
조선시대 병서 '무신수지' 등 참고…280쪽, 가로 11㎝·세로 18㎝ 휴대 간편
군인의 종교 통해 강한 신념 강조…새롭게 상비군 창설 의지도 표출

[이상훈의 한국유사] 박용만 선생이 편찬한 군사교범 '군인수지'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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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가 개봉해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1910년 일제는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했지만 우리의 독립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압록강ㆍ두만강을 건너 만주·연해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고 이것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밑거름이 됐다.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은 만주와 연해주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나타났다.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했다. 1904년 일제에 황무지 개척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다 투옥되고 감옥에서 이승만과 정순만을 만나 의형제가 됐다. 그는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며 항일무장 투쟁론과 임시정부 건설론을 주창했다. 1909년 네브래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고 1914년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창설하는 등 실질적인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1년 박용만은 당시 미주 한인사회의 최대 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의 초빙으로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이 됐다. 당시 신한민보에서는 '군인수지(軍人須知)'라는 책을 편찬했다. 군인수지는 군사교범으로 분류돼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편찬됐는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박용만은 책 제목을 왜 군인수지라고 정했는지 밝혀두지 않았다. 다만 그가 여러 병서와 군사교범을 참고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병서인 '무신수지(武臣須知)'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신수지는 '무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을 담은 것으로 현재의 지휘통솔 지침서와 유사하다.


박용만 스스로 '역술(譯述)했다'고 표현한 점으로 미뤄 군인수지는 여러 나라의 군사교범들을 참고해 번역하면서 정리한 듯하다.

서술 내용을 보면 일본과 미국의 군사교범을 기본으로 독일이나 러시아 등 서구의 군사교범도 많이 참고한 것 같다. 여기에 우리나라 이전 군제도 상당 부분 참고해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분량은 1책 280쪽이다. 1쪽은 10행으로 구성돼있다. 행당 최대 글자는 27자까지 서술돼있다. 체재는 육군 군제, 군인의 종교, 군대 내무의 대략, 육군 예식의 대개 등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개별 장은 40장으로 편성돼있다. 군인수지는 1911년 6월24일 신한민보에서 인쇄해 7월4일 신서관 이름으로 발행했다. 크기는 가로 11㎝, 세로 18㎝다. 개인 병사가 휴대하기 용이하도록 이만한 크기로 만든 듯하다. 군인수지에 개인별·제대별 훈련이나 전술 내용은 포함돼있지 않다. 따라서 개인별·제대별 규율이나 운영 개념으로 작성된 듯싶다.


[이상훈의 한국유사] 박용만 선생이 편찬한 군사교범 '군인수지' 박용만 장군

군인수지는 전체적으로 띄어쓰기 없는 한글로 작성돼있다. 다만 일부 한자가 병기돼 이해를 돕고 있을 따름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간부는 물론 절대 다수인 일반 병사들을 주요 대상으로 간행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육군 군제는 어느 나라 하나를 특별히 표준할 것이 아니라 시세와 형세를 따라 가히 참작하여 편제할지니, 시방 덕국이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법국이나 또 아라사 같은 나라의 제도를 의지하여 편제하면, 과히 틀리는 것이 서로 없음이라."


박용만은 군인수지를 편찬하면서 육군 군제는 어느 한 국가를 표준으로 삼지 말고 상황에 맞게 적절히 편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일본, 독일(덕국), 영국, 프랑스(법국), 러시아(아라사) 등 여러 국가의 군제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어느 나라 병서를 보든지 그 첫편 첫줄에 기록하여 가로되"라는 표현, "각국 군인의 복장과 군장을 상고하여 보면 비록 여러 나라가 다 한결같지 않으나"라는 문장을 보면 박용만은 군사교범의 세계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해한 상태에서 군인수지를 편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용만은 기본적으로 외국 군제를 많이 참조했지만 우리나라 군제도 적지 않게 반영하려 노력했다. "우리나라에서 이전에 사관학도는 하사와 동등한 대접을 받으라 하였으나… 사관학도는 응당 정교와만 동등으로 치는 것이 가하니라"고 그는 서술했다. 대한제국의 군제를 반영하면서도 이전 군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또한 "연대장은 그 휘하에 부관 한 사람을 두노니, 우리나라 이전 군제로 말하면 소위 부관은 비장과 같으니라"고 적었다. '비장(裨將)'은 보좌하는 장수라는 의미로 그가 대한제국 이전의 군제도 고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7장 군인의 의무에는 군인들이 지켜할 예절로 "여인을 만나면 갓을 들어 예를 표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제11장 군인의 정칙에는 내무생활을 할 때 "저고리를 벗는 것은 연대장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또 내무생활을 할 때 "골패나 투전을 함부로 들여놓는 것을 금지한다"고 못 박았다. 단순히 외국 교범을 번역한 수준이 아니라 한국인 장병들이 읽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한국식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전의 군사교범들은 기본적으로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됐다. 하지만 군인수지는 전체적으로 한글로 작성된 데다 될 수 있으면 한국식 용어가 적용됐다. 다시 말해 고등교육을 받은 간부용 군사교범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일반 병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병대를 구별함에 이전의 우리나라에서는 보병은 검은 옷을 입고 헌병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만일 우리가 상비병을 다시 세우는 날에는 이전 복식을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고, 또 혹 서로 작정하여도 관계가 없느니라."


여기서 1911년 당시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에서 언젠가 새롭게 상비군을 창설할 것이라는 의지가 엿보인다. 군인수지라는 군사교범은 그 중요성에 비해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앞서 설명했듯 군인수지는 육군 군제, 군인의 종교, 군대 내무의 대략, 육군 예식의 대개 등 4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실제 내용별로 살펴보면 육군 군제, 군인의 종교, 군대 내무의 대략, 직책별 임무, 지휘 관리, 육군 예식의 대개 등 6부분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군대 내무의 대략, 직책별 임무, 육군 예식의 대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즉 내무 생활, 중대 단위, 군인 경례를 중시하는데 이는 모두 군인의 기본자세 확립과 관련돼있다. 다시 말해 장병들이 군대에 들어와 생활할 때 필요한 기본 요령들을 적은 것이다.


육군 군제와 군인의 종교는 일본·미국 등 외국 군제와 대한제국 군제를 참조해 육군 군제의 형식적인 면과 군인의 정신적인 면을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군대 내무의 대략, 직책별 임무, 지휘 관리는 목차와 내용으로 볼 때 1908년 일본에서 편찬된 '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를 주로 참고한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박용만은 유형별로 항목들을 재구성하고 신규 항목을 만들거나 기존 항목들을 생략한다든지 용어를 변경해 재정리했다.


육군 예식의 대개는 대한제국의 '육군예식(陸軍禮式)' 형식을 기본으로 미국과 일본의 군제를 반영해 정리한 것이다. 1900년 4월 편찬된 '육군무관학교학도계칙(陸軍武官學校學徒戒則)'은 무관학도들이 배워야 할 내용을 술과(術科)와 학과(學科)로 구분했다. 술과는 도수각개(徒手各個)·집총각개(執銃各個)·집총교련(執銃敎鍊), 학과는 보병조전(步兵操典)·육군예식·내무서(內務書) 세 가지다.


군인수지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가르친 학과 가운데 보병조전을 제외한 육군예식과 내무서 중심으로 국내외 군사교범들을 참조해 내용을 재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앞서 '첫 편 육군 군제'와 '둘째 편 군인의 종교'를 새롭게 편성해 장병들이 먼저 군사제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군인으로서 강한 신념을 갖도록 했다. 박용만의 군인수지는 장병들이 군대에 입대해 전술훈련 외에 '군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들'을 정리한 군사교범이었던 것이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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