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日경제보복 무기 3종,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분 14초
뉴스듣기 글자크기

포토레지스트, 반도체 생산 공정에 필수·불화 폴리이미드는 디스플레이 소재
제조기술 이미 확보 불구 양산은 다른 얘기…지금이라도 소재 국산화 노력해야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日경제보복 무기 3종,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김병민 과학저술가
AD

동네 초등학교 옆을 지나던 길에 작은 문방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형 문구점 때문에 사라진 줄 알았던 문방구가 예전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딱히 살 건 없었지만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형형색색의 물건들이 좁은 공간에 빼곡하게 쌓여 있거나 걸려 있었고 특유의 향을 내뿜고 있었죠.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한 주인의 눈빛에 뭔가 사야 했고 둘러보니 익숙한 물건이 보였습니다. '태양으로 그리는 그림'이란 제목이 붙어 있는 감광지였죠. 이 종이는 빛에 반응해 색이 변하는 원리로 필름이나 물체를 올리고 빛을 비추면 그림자 형태로 그림이 나타나는 놀이 도구입니다.


최근 한국과 일본 사이에 발생한 무역갈등은 일본의 특정 소재 수출규제로 시작됐습니다. 소위 침략에 가까운 일본의 행위에 정부와 언론은 분석과 비판 그리고 대응과 해법을 연일 내놓고 있습니다. 이 소재가 어떤 물질인지 몰라도 스스로 반도체 강국이라고 알고 있던 국민은 이런 소재조차 만들지 못해 대부분 일본에 의존하고 있던 민낯에 충격을 받았죠. 수출규제 품목은 에칭 가스인 불화수소산과 고분자인 불화 폴리이미드, 포토리지스트 3종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무척 낯선 제품입니다. 수많은 수출품 중에 특정 품목만 꼭 집어 규제한 이유도 그만큼 반도체 산업에 중요한 소재라는 반증일 겁니다. 이 소재는 얼마나 중요한 걸까요.


우리가 어릴 적에 태양이나 전구의 빛을 이용해 감광지에 그림을 그렸던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반도체 공정은 이 놀이가 정밀하게 바뀐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반도체는 실리콘이라는 기판 위에 반도체 물질을 3차원 형태의 고집적 회로로 만든 겁니다. 그런데 이 회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고 정밀해서 물리 화학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만들 수 있습니다. 커다란 필름으로 인쇄된 반도체 설계도는 빛과 렌즈를 이용해 반도체 기판 위에 작게 비칩니다. 영화관에서 필름을 스크린에 확대하는 것과 반대로 설계도를 미세하고 작게 비추는 겁니다. 이때 특정 물질이 반도체 위에 도포되는데 이것이 바로 포토레지스트입니다. 빛에 의해 반응하고 반도체 설계도가 정밀하게 그려지는 것이죠. 바로 포토레지스트가 감광지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려진 그림을 따라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야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것이 불화수소입니다. 반도체는 정밀한 감광과 식각이 수없이 반복되며 회로가 층으로 쌓이며 만들어집니다. 반도체 웨이퍼 한 장을 만드는 데 몇 주가 걸릴 정도로 오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이 필요하죠. 결국 일본이 수출을 까다롭게 만든 제품은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우리나라 주력 제품인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필름입니다. 불소를 결합한 고분자 물질로 불소 덕분에 열과 물리적 충격에 강해 디스플레이 산업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죠. 그러고 보니 불소라는 원소가 중심에 있습니다.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日경제보복 무기 3종,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불화수소와 고분자 필름에 들어 있는 주요 성분인 플루오린(불소·F)은 인류가 다루기에 까다로운 원소 중 하나입니다. 플루오린은 다른 물질과 반응을 잘해서 천연에서 원소 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원소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원소 분리가 쉽지 않은 이유는 결합력뿐만 아니라 독성도 한몫을 했죠. 불소와 수소가 결합한 작고 간단한 화합물인 불화수소에서 그 독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석에서 쉽게 추출되는 불화수소가 피부에 닿을 경우에 분자 크기가 작기 때문에 피부에 잘 흡수됩니다. 흡수된 불화수소 일부가 서서히 인체의 수분과 결합하며 플루오린 이온이 파고들며 칼슘과 마그네슘과 반응하고 뼛속 골수조직까지 침투해 뼈를 녹입니다. 만약 호흡기를 통해 불화수소 기체가 들어오면 몸속 장기를 녹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죠. 많은 과학자가 이 원소를 분리하려다 고통을 받았습니다. 불화수소의 강한 성질은 18세기 중반에 스웨덴 화학자 칼 빌헬름 셀레에 의해 밝혀집니다. 그는 형석을 황산으로 가열해 불화수소를 만들었고 유리와 같은 규소 물질을 녹여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플루오린의 존재를 알고 원소 이름을 제안한 험프리 데이비도 불화수소에서 원소를 분리하려다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지요. 1886년 프랑스 화학자 앙리 무아상이 전기분해로 원소 상태의 플루오린 분리에 최초로 성공했고 대신 이 실험으로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플루오린 분리를 위해 희생한 과학자를 '플루오린 순교자'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분리 성공은 그만큼 어려웠고 값진 일이었지요. 이런 이유로 1906년에 무아상은 노벨화학상을 받았습니다. 공교롭게 같은 해 후보는 1869년에 주기율표를 창시한 멘델레예프였습니다. 노벨상 위원회가 불소 분리에 손을 들어준 탓에 멘델레예프는 고배를 마시고 다음 해 수상을 기약했지만 1907년 사망하게 됩니다. 노벨상은 사망자에게 주어지지 않는 규정 때문에 주기율표 탄생이라는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벨상을 타지 못했죠. 멘델레예프에게는 다소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요. 그런데 주기율표 탄생 150년이 지난 지금 불소 때문에 우리에게 더 억울한 일이 생긴 겁니다.


플루오린과 그 화합물을 다루기 어렵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기초과학기술에서 우리보다 우위에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 기업이 수입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상황처럼 우리 과학기술력이 열악할까요. 간혹 언론에서 우리가 불화수소 제조 기술은 있지만 불순물이 많아 파이브 나인(99.999%) 이상의 고순도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기사로 양국의 기술격차와 수입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고순도뿐만 아니라 초고순도 불화수소 제조 기술은 이미 중소기업에서 특허까지 확보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고순도 불화수소는 반도체 기업에도 의미가 없습니다. 초미세 반도체 공정에서는 불화수소가 아닌 아르곤 플라스마를 사용하는 건식 식각을 사용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서둘러 고순도 불화수소 생산 시설을 갖추고 반도체 공정에 적용하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연구소 실험실과 산업의 양산 시스템은 완전히 다르고 반도체 공정에서 불량률은 곧 매출로 직결되니 새로운 제품을 공정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설비 투자 비용과 장기간의 제품 적응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업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왜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걸까요.


대기업은 이미 품질이 증명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수입하면 되는데 굳이 소재 설비 투자와 시간까지 인내하며 국산 제품으로 바꿀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이런 재료뿐만 아니라 반도체 설비에 필요한 핵심장비를 중심으로 국내 중소기업과의 동반 발전을 확대해 자립기반을 만드는 것보다 손쉽게 수입에 의존해 외적 성장을 택했던 것이죠. 물론 모든 부품을 자급자족하는 것보다 글로벌 분업체계가 성장에 더 유리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이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를 수직계열화한 독자노선으로 경쟁력이 약화해 반도체에서 패망했다는 사실로 증명됐으니까요. 오늘날 일본이 반도체 부품 소재에 집중한 것도 이런 국제 분업체계에 편승하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우리의 수입 의존도가 너무 높았습니다. 고순도 품질이라는 방패로 국내 기업과 상생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산업 생태계는 기형화돼 커다란 위협을 스스로 키운 겁니다. 이러한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돼왔지만, 성장이라는 목표만을 가지고 온 우리는 많은 것을 무시하고 잃어버린 겁니다. 국민 한 사람으로서 어이없는 행동을 한 일본에 대항해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한편으로 기회가 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뒤틀린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은 충분히 확산했으니까요. 하지만 기회도 위기를 넘겨야 찾아오겠지요. 우리는 낙관론보다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돼야 합니다. 쉽게 바꾸고 해결할 수 있다는 성급함보다 냉정하고 비관적으로 우리 현실을 봐야 합니다. 충분히 해낼 수 있다며 촛불의 정신을 비유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무역전쟁은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의 정부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고 매도하며 도발한 침략행위입니다. 내부의 적들과 서로 싸울 시간도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외교와 협상으로 풀어가야 하지만 주권 침해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자주권과 국제사회의 품위는 우리 스스로 지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고도 합니다.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죠. 결국 일본의 자해에 가까운 행동은 자국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약화하고 국제 신뢰를 잃는 결과로 올 겁니다. 지금 TV에는 일본이 세 품목의 수출규제에서 확대해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한국을 공식적으로 제외한 보도가 나오고 있고 그 옆에는 문방구에서 가져온 감광지가 놓여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감광지 뒷면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메이드 인 저팬'이 적혀 있지 않았더군요.



김병민 과학저술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