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안녕하지 못한 기생충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분 16초
뉴스듣기 글자크기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안녕하지 못한 기생충 김병민 과학저술가
AD

연가시란 기생충에 감염되어 뇌를 조종당한 사람들이 물에 뛰어들어 죽는 내용의 '연가시'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연가시는 짝짓기를 물에서 하기 때문에 숙주인 곤충 뇌에 갈증을 유발하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해 숙주를 물로 뛰어들게 합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아쉬운 구석은 이 영화가 왜곡된 지식을 심어줬다는 겁니다. 이 영화 때문에 대부분 기생충이 숙주에게 피해를 준다는 불편한 공식이 관객에게 전달됐죠. 7년이 지나 기생충 영화가 또 다시 등장했습니다. 제목마저 기생충인 영화는 실제 기생충을 다룬 것이 아니라 기생충의 정체성을 관객에게 맡기고 사회의식을 영리하고 예리한 장르 기법으로 풀어냈습니다. '가난의 전형'과 '기생충'을 감독 특유의 연출로 연결했지요. 그런데 이 영화는 과거의 굴절된 정보를 또 한 번 관객에게 비췄습니다. 무모하게 자신의 숙주를 파멸하는 기생충을 드러낸 겁니다. 물론 영화에서 어디에도 기생충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넘을 듯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다'는 표현과 '특유의 냄새'라는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세상을 이등분 합니다. 영화는 이등분 된 수직 구도 아래의 삶을 전혀 아름답지 않게 그려냈고 심지어 그 삶의 주역들을 사악한 기생충으로 만들어 결국 숙주를 파괴해 공멸하거나 불멸하는 존재로 그렸습니다.


원래 기생충의 목적은 숙주 안에서 오랫동안 사는 겁니다. 영화처럼 대책 없이 숙주를 죽인다면 기생충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오히려 영화에서 기생충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찾는다면 주인 몰래 지하 벙커에 숨어 식량을 축내며 은닉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기를 바랐던 가사도우미의 남편이겠지요. 숙주로 묘사된 부잣집에서 한 끼의 식량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기생충은 숙주를 죽이지도 않고 숙주가 살아가는 데에도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충의 정보가 모두 틀렸단 말일까요? 물론 일부는 맞을 수 있지만, 우리가 기생충에 대한 편견으로 전체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한 겁니다. 이런 편견의 형성은 영화 몇 편으로 생긴 것은 아닐 겁니다. 여기에는 기생충이 특정 질병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고 의학과 과학이 동원되며 인류가 박멸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015년의 노벨 생리의학상은 기생충 치료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에 수여됐습니다. 아직도 기생충에 연구할 게 있냐 할 지 모르겠지만 기생충 연구는 현재진행형이고 그 역사는 19세기 말부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6번의 노벨상이 기생충과 관련된 겁니다. 긴 시간을 관통한 질병은 말라리아였고 이로 인해 기생충 전체 개체에 대한 오해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안녕하지 못한 기생충 영화 '기생충' 포스터.

말라리아 연구는 1880년 프랑스의 라브랑이 말라리아의 병원체인 기생충을 질병의 원인체로 주장하면서 시작됩니다. 이후 1897년 영국의 로널드 로스가 인도에서 조류 말라리아를 연구하다가 얼룩날개모기의 위벽에 붙어있는 말라리아 원충을 찾아냅니다. 그는 모기를 통해 말라리아가 전파된다는 것을 밝혀내고 노벨상을 받습니다. 기생충에 대한 연구는 고귀한 오류를 낳기도 했지요. 1926년에 요하네스 피비게르가 기생충이 위암을 유발한다는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암이 감염에 의해 발병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죠. 100여년 전에 암의 원인을 알아냈다는 건 큰 사건이었죠. 하지만 후속연구에서 원인은 기생충이 아니라 비타민A의 결핍이었고 실험 결과를 잘못 분석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과학지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은 것을 보고도 잘못된 결론으로 귀결된 것도 있지요.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수와 실패 뒤에 늘 중요한 결과를 끌어내기도 합니다. 피비게르의 수상은 노벨상의 오점으로 남았지만, 그의 연구를 기반으로 실제로 다양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스피롭테라 루피나 간흡충은 식도암이나 담도암을 유발합니다. 호주 과학자인 배리 마샬은 1980년대에 위궤양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박테리아를 위암의 원인이라 밝혔지요. 유두종 바이러스가 자궁경부암을 일으킨다는 것이 밝혀져 많은 여성이 백신으로 암을 예방하고 있습니다. 기생충 연구는 엉뚱한 질병을 치료하기도 합니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에 매독은 그야말로 천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환자에게 말라리아를 강제로 주입해서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매독균은 고열에 약해 말라리아로 환자의 체온을 올려 치료한 겁니다.


지금은 잔류성 유기화합물로 사용이 제한된 독성물질인 디클로로디페닐트라클로로에탄(DDT)는 말라리아 퇴치가 목적이었죠. 인류를 구원했던 DDT 합성에 1948년 노벨상이 주어진 이후 60년이 지나, 기생충 관련 연구에 다시 한 번 노벨상이 수여된 겁니다. 금지된 DDT를 대신할 말라리아 치료제인 '아르테미시닌'을 개발한 공로였죠. 100년이 넘는 지난한 세월 동안 인류를 괴롭힌 말라리아의 원인은 기생충입니다. 기생충은 숙주를 죽인다는 공식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회충이나 요충의 끔찍한 사진에 공포를 느끼며 기생충 박멸을 위해 학생들 대변을 검사하고 구충제를 처방하는 연례행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기생충 학자인 서민 교수는 질병과 더불어 기생충의 끔찍한 외모 때문에 기생충이 더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기생충은 모든 숙주를 죽이지 않습니다. 회충이나 요충 등 우리가 잘 아는 기생충은 우리에게 큰 해를 입히지 않지요. 기생충의 숙주는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중간숙주'는 말 그대로 중간에 잠시 지나는 숙주입니다. 기생충이 어린 시절을 보내는 숙주이지요. 기생충이 어른이 돼 번식기를 지내는 숙주는 '종숙주'입니다. 중간숙주에 있던 기생충은 성장하며 번식을 위해 종숙주로 가야 하는데 스스로 이동을 못 합니다. 그래서 기생충은 중간 숙주를 종숙주의 먹이로 바치게 합니다. 말라리아에는 모기가 종숙주이고 사람이 중간숙주입니다. 하지만 종숙주에게는 비록 양분을 나누고 있지만,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 양식을 취하며 예의를 지키고 숙주의 삶에 나름의 기여를 하고 있지요. 공생 혹은 상생을 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혐오의 대상으로 제거를 했던 회충, 요충, 편충과 같은 기생충은 우리가 종숙주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 몸에서 기생을 하지만 각종 미생물과 공생을 하며 면역시스템의 일부로 우리의 건강도 지켜왔습니다. 우리가 그 기생충을 몸에서 강제로 제거하면서 면역에 이상이 와서 알레르기 등 자가 면역 질환이 증가한다고도 합니다. 최근 의학계에서 알레르기 치료 연구에 기생충을 이용하기도 하지요. 이쯤 되면 기생인지 공생인지 혼동될 정도입니다. 이제 기생충에 대한 편견은 버릴 때가 됐습니다.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안녕하지 못한 기생충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기생충으로 표현된 가난한 기택의 아들 기우는 반지하에서 올라와 땅 위에 사는 꿈을 꿉니다. 꿈에서 멈추지 않고 숙주처럼 살려 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기생충은 생태계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숙주처럼 살길 바라지 않습니다. 물론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영화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보면 됩니다. 영화가 사회적 도구가 되는 건 감독도 바라지 않겠지요. 하지만 만약 감독이 주장하는 판단과 감정을 일으키는 기준선이 냄새이고 그 아래는 기생충이라는 이분법 된 구도라면 우리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바로 무수한 선이 그어진 현대 사회의 민낯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이라는 매개로 양극화되며 인간적인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상황은 갈수록 확산됩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임대와 분양을 가르는 벽은 선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칼이 됩니다. 말라리아 치료제가 수 십년 전부터 개발이 됐는데도 아직도 수 백만명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냄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 선의 건너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차가운 시선 때문은 아닐까요. 어쩌면 그런 관찰이나 관심조차 없을 수도 있지요. 우리는 늘 달의 앞면만 보는 것처럼 달의 뒷면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익숙하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치워버리기 때문입니다. 쓰레기는 우리가 잠든 시간에 치워져야 하고, 혐오라는 딱지가 붙은 각종 시설은 자신의 삶에서 멀리 두려고 합니다.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는 도심으로부터 먼 곳에 떨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겨운 노동으로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합니다. 영화를 본 많은 분이 불편한 느낌이 든 건 자신의 민낯을 봤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선은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가 무의식중에 그었던 선 너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영화에는 그들만의 언어인 모르스 부호가 나옵니다. 그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기생충의 본래 목적과 다르게 숙주와 공생이 아닌 공멸하는 최후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숙주가 기생충을 거부하면 기생충은 다른 종숙주를 찾기 위해 지금의 종숙주를 중간숙주로 삼을 테니까요.



김병민 과학저술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