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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농부들의 라파엘로, 장 프랑수아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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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농부들의 라파엘로, 장 프랑수아 밀레 <도판, 왼쪽 세로 그림부터 시계방향으로> 1. 장 프랑수아 밀레,「키질하는 사람」, 1847년~1848년 (100.5×71㎝, 내셔널 갤러리, 영국 런던) 2. 장 프랑수아 밀레, 「저녁종」, 1857년~1859년(55.5×66㎝,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파리) 3. 알베르 베타니에, 「파리의 미술품 경매장, 오텔 드루에」, 1921년 (80.6×100㎝,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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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농부들의 라파엘로, 장 프랑수아 밀레

프랑수아 밀레는 1814년 노르망디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림 재주가 있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으나 살롱 전에 번번이 낙선했다. 이류 화가로 전전하던 밀레는 서른세 살이 되던 1847년에야 살롱에 간신히 그림을 걸었다. 다음 해 기회가 찾아왔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립 왕이 쫓겨나고 제2 공화국이 출범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면서 그 해 살롱은 심사위원을 두지 않고 접수된 작품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키질하는 농부' 같이 노동자가 등장하는 작품이 심사를 통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그림은 공화주의 정치가 르드뤼 롤랭에게 팔렸다. 롤랭은 밀레에게 정부 주문도 주선해주었다.


목돈을 처음 만진 밀레는 용기백배했다. 그 돈으로 파리 남쪽의 바르비종에 작업실을 얻었다. 여기서 농촌을 소재로 한 그림에 전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녹록하지 않았다.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6월에 노동자들이 봉기했고, 크고 작은 소요가 계속되었다. 선거에 의해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으로 뽑힌 루이 나폴레옹은 이를 핑계로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공화제는 폐지되고 제정이 수립되었으며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로 등극했다.


붉게 탄 얼굴, 거친 손을 지닌 농부들을 그린 밀레의 그림은 보수화된 중산층을 불쾌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보수적 비평가들은 밀레의 그림이 추하다고 분개했고, 사회투쟁을 부추기려는 의도가 숨어있지 않나 촉각을 곤두세웠다. 진보적인 비평가들은 그들대로 밀레의 그림을 사회 개혁과 엮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농 출신인 밀레는 보수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노동자들이 봉기하자 덜덜 떨었으며 기자들이 자신을 사회주의자, 혁명주의자로 단정하자 "나를 왜 그런 사상과 관련시키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1850년대에 미술시장이 커지면서 데생과 소형 그림들이 팔렸지만 성공은 여전히 멀리 있었다. 미국인 수집가들이 그나마 숨통을 터주었다. 밀레의 그림은 항상 논란거리였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1857년 '이삭 줍는 여인들'이 살롱에 발표되자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으나 쥘 카스타나리는 "빈곤에 대한 성실한 탐구"라고 이 그림을 옹호했다.


1860년대가 되자 밀레는 어느 정도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57년 여름 밀레는 미국인 화가 토머스 애플턴에게 그림을 의뢰받았다. 그는 저녁 들판에서 한 농민 부부가 감사 기도를 올리는 그림에 착수했다. 들판에서 감자를 캐던 부부가 저녁종이 울리자 일손을 멈추고 기도를 올린다. 남자 옆에는 쇠스랑이 있고 여자 옆에는 바구니와 자루를 실은 손수레가 있다. 남녀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했던 19세기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나막신을 신고 흙 묻은 옷을 입었지만 두 사람은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다.


'저녁종'에는 농촌에서 자란 밀레의 어린 시절 기억이 스며있다. 밀레의 할머니는 들판에서 손자들을 데리고 일하다가 저녁종이 울리면 반드시 일손을 멈추게 하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밀레는 그다지 신심이 깊지 않았고 자라서는 성당에도 나가지 않았지만 농촌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자연스럽게 이 광경을 떠올렸다.


밀레는 역광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뒤쪽에서 비치는 빛 때문에 두 사람의 표정이나 복장 같은 세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의 전체적인 실루엣이다. 텅 빈 들판에 외롭게 서서 하루 일을 마치는 의식을 행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숙연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훗날 밀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게 될 작품이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애플턴은 그림을 인수하지 않았다. 밀레는 '감자 수확에 감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붙였던 제목을 '저녁종'으로 변경하고 약간 가필을 한 다음 파리에 거주하던 벨기에인 미술상 알프레드 스티븐스에게 1000프랑을 받고 넘겼다. 일류 아카데미 화가들의 그림은 2~3만 프랑을 호가했지만 그때까지 중간 크기 그림 한 점 당 400~600프랑 정도를 받아온 밀레로서는 잘 받은 가격이었다. 밀레는 스티븐스와 한 점당 1000~2000프랑의 가격으로 스물다섯 점의 그림을 넘겨주겠다는 계약도 체결했다.


밀레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1848년 이후 일어난 사실주의 운동이 알게 모르게 뿌리내린 결과였다. 사실주의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주도한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사회주의 운동가 프루동의 친구였던 쿠르베는 이론적 강령을 만들고, 작품을 통해 그것을 실천했다. 밀레는 이론가가 아니었고 정치 성향도 우익에 가까웠으나 꾸준히 사회 최하층계급을 그림으로써 어느 덧 사실주의 유파의 선도자가 되어 있었다. 1868년 제2 제정은 밀레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인상주의가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바르비종파의 불온함이 옅어진 것이었다.


1870년 세상이 또 한 번 뒤집어졌다.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에 무모하게 선전포고를 해 보불전쟁을 일으켰다. 프러시아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결과는 프랑스의 참패였다. 나폴레옹 3세는 가족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제2 제정은 와해되었고 제3 공화정이 들어섰다. 제3 공화정은 밀레를 '농부들의 라파엘로'로 추켜올렸다. 밀레는 더 이상 수상한 혁명주의자가 아니라 노동의 신성함을 고귀하게 묘사한 도덕가, 교육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인생의 마지막 몇 년간 국민적 사랑을 듬뿍 받은 밀레는 1875년 눈을 감았다.


밀레가 세상을 뜬 후 그의 그림 값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1860년 1000프랑에 팔렸던 '저녁종'은 몇 사람의 손을 거친 후 1881년 수집가 으젠 스크레탕에게 16만프랑에 팔렸다. 1889년 사업에 곤경에 빠지자 스크레탕은 '저녁종'을 포함한 컬렉션을 경매에 내놓았다. 이 경매는 국제적 관심을 끌었고 부유한 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저녁종'이 국외로 반출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 전직 예술부 장관 앙토냉 프루스트는 경매에 참가해 55만3000프랑에 낙찰 받았다. 그러나 프루스트는 거금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림은 55만2000프랑에 경쟁자인 미국미술연맹이 차지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저녁종'은 각 도시를 돌며 전시되었다.


1890년 백화점 소유주인 알프레드 쇼사르는 이 그림을 80만 프랑에 되사들였다. 불과 일 년 만에 25만 프랑 가까이 가격이 뛴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쇼사르가 애국적인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1909년 쇼사르는 이 그림을 국가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저녁종'의 가파른 가격 상승은 추급권(droit de suite) 개념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추급권이란 작품이 다시 판매될 때마다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를 원저작자인 미술가에게 지불하는 재판매 저작권(resale royalty right)을 말한다. 스크레탕은 1881년 16만프랑에 사들였던 '저녁종'을 1889년 55만2000프랑에 팔았다. 스크레탕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동안 밀레의 얼마 안 되는 유산을 탕진한 가족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동정 여론이 일었고, 작품이 재판매될 때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를 미술가나 유족에게 보전해주어야 한다는 추급권 개념이 고개를 들었다.


프랑스는 1920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추급권을 법제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미술가들의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법을 제정할 당시 재판매 저작권료는 판매가의 1~3퍼센트였으나 1957년 법 개정을 통해 3퍼센트로 단일화했다. 프랑스에 이어 독일도 1965년부터 추급권 제도를 시행했다. 2001년 지적재산권에 관한 베른협약이 체결된 후 유럽연합 국가들은 모두 추급권 제도를 받아들였다.


스위스, 러시아 등 유럽연합에 속하지 않은 유럽 국가, 아시아ㆍ미주 대륙은 이런 제도가 없다. 미국은 캘리포니아 주만이 예외적으로 5퍼센트의 추급권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도 이 제도가 없다. 추급권은 작품 거래가 다시 이루어질 때마다 일종의 세금을 지불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술품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미술품 거래의 투명성이 높아지고 예술가의 창조적 노력을 보상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장점을 지니고 있다. 미술시장의 규모가 커진 한국에서도 추급권 제도를 고려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이미혜 예술사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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