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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사문화된 헌법의 대학 자율성 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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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사문화된 헌법의 대학 자율성 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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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교육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위한 대학 학사 운영 권고안을 발표했다.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집합수업 대신 재택 수업을 실시하되, 구체적인 방식은 각 대학의 여건에 맞게 자율적으로 정하라는 것이다. 기존의 교육부 기준은 교양과 전공 각각 20%를 초과하여 원격 수업 교과목을 개설할 수 없고 수업 한 번(시수)당 콘텐츠 진행 시간이 25분 이상 돼야 하며 대리출석 차단 시스템도 갖추도록 했으나 이번 학기에는 적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권고안'으로 포장했지만 대학에는 '강제안'으로 받아들여졌고, '자율적'으로 정하라고 했지만 교육부의 세세한 기준을 따르려면 자율적으로 정할 여지는 거의 없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국내 대학의 온라인 강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온라인 강의 비중이 미미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대학은 지원 인력과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동안 교육부가 원격 수업을 규제한 결과다.


자율성이 없는 것은 원격 수업만이 아니다. 수업연한, 학년도 구분, 수업일수, 학점당 이수 시간, 학점 인정의 범위와 기준 등 학사 운영은 당연히 교육부 통제 내에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융합 전공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입학 정원이 없는 융합 학과 설치는 불가능하다. 성인 학습자를 위한 맞춤형 입학 전형도 제한돼 있다. 입학 정원은 물론이고 수시 비율, 정시 비율, 면접 문항, 논술 문항까지 통제받는다. 신규 교수를 채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특정 대학 출신 비율, 심사 단계별 준수 사항, 심사위원 선정 원칙, 채용 공고 방법 등 구체적인 통제가 따른다. 물가가 오르든, 교수를 더 채용하든,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든 해당 대학의 평균 등록금이 전년도보다 늘어나면 안 되고 앞으로는 입학금도 받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제4항은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문화된 지 오래다. 대학 자율성 조항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지만 대학의 자율성을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 자율성을 법률로 적극 보장하겠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헌법 정신은 대학에 대하여 규제할 수 있지만 포지티브 방식(원칙적 금지ㆍ예외적 허용)이 아니라 네거티브 방식(원칙적 허용ㆍ예외적 금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987년 개정헌법에 추가된 조항인데 헌법 개정 이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대학에 대한 규제는 여전히 포지티브 방식이다.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독립적인 법률이 제정된 것도 아니고 대학 규제 관련 법률이 획기적으로 완화된 것도 아니다. 법률로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사례도 드물지만, 법률로 보장된 자율성마저 행정지침으로 무력화하는 경우가 많다.


고등교육법은 직전 3개 연도 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의 1.5배 범위 내에서 등록금을 인상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만 국가장학금 지원 지침이 이를 막고 있다. 입학금 폐지 과정을 보면 매우 반헌법적이다. 대학을 압박해 입학금 폐지를 먼저 결정해놓고 나중에 입학금을 받을 수 없도록 고등교육법을 개정했다. 이것이 법률에 의한 대학 자율성 보장의 민낯이다. 대학 자율성의 핵심 분야인 학생 선발, 학사 운영, 대학 인사, 대학 재정 등은 가히 규제 백화점이다. 대학들의 원성이 높아지면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문제가 되는 규제를 찔끔 개선하는 포지티브 방식은 갈증만 더할 뿐이다. 지난해 교육부가 발표한 '인구구조 변화와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대학 혁신 지원 방안'은 전향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전형적인 포지티브 방식의 규제 개선 방안이었다.


헌법 정신을 반영해 원칙적으로 대학 자율성을 보장하되 예외적으로 규제하는 입법이 절실하다. 대학에 대한 규제가 획기적으로 철폐되지 않는다면 대학에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육학부 교수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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