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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두 벌의 모나리자' 둘 다 다빈치 진품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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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명문장가 고티에·미슐레 미사여구로 신비에 쌓인 팜파탈 이미지 변신
1911년 루브르서 전시중 도둑 맞아 연일 언론 대서특필 '독보적 아이콘' 등극
1960년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등장…수집가 헨리 퓰리처 저서에서 진품 주장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두 벌의 모나리자' 둘 다 다빈치 진품이라는데… 이미혜 예술사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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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가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수도로 부활한 것은 16세기 중반이다. 이전 시대 왕들은 루아르강 계곡의 성(城)에 살았다. 샤를 7세는 쉬농성에, 루이 11세는 앙부아즈성에 살았다. 프랑수아 1세도 퐁텐블로성을 지어 옮겨갈 때까지 앙부아즈성에 살았다. 루아르강 계곡에는 왕이나 귀족, 그들의 애인만 살았던 게 아니다.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도 살았다.


프랑수아 1세는 왕위에 오르자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전투에서 이겼으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압도당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화가ㆍ조각가들을 데려왔다. 이때 왕궁을 꾸미고 다빈치도 초청했다.


다빈치는 능력에 비해 후원자 복이 없었다. 경쟁자 미켈란젤로(1475~1564)는 교황청으로부터 후원받으며 대작을 완성했다. 하지만 다빈치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몰락한 이후 안정적인 후원자를 찾지 못했다. 프랑수아 1세가 초청했을 때 다빈치는 후원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 막막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1516년 프랑스로 건너간 다빈치는 '최고의 화가, 기술자, 왕의 건축가'라는 호칭과 함께 환대받았다. 왕은 그에게 연금을 주고 앙부아즈성 바로 옆에 있는 아담한 클로뤼세성도 내주었다. 스물두 살의 젊은 왕은 국정을 돌보랴 정부(情婦)들과 사랑을 나누랴 바빴다. 하지만 짬이 나면 다빈치와 환담을 나누며 뿌듯함도 느꼈다. 다빈치는 1519년 클로뤼세성에서 눈을 감았다.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의 말년을 돌봐준 덕에 프랑스는 모나리자를 얻게 됐다. 모나리자는 1518년 왕실 컬렉션에 포함됐다. 프랑수아 1세가 화가로부터 직접 샀는지 아니면 선물받았는지 구체적인 사항은 기록돼있지 않다. 프랑수아 1세는 그림을 퐁텐블로성에 보관했다.


1690년대 루이 14세는 퐁텐블로성의 컬렉션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겼다. 이후 모나리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있었다. 대혁명 직후 혁명정부는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대중에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베르사유 궁전에 있던 왕실 컬렉션은 루브르 미술관의 토대가 됐다. 모나리자는 이후 지금까지 루브르에 걸려 있다.


19세기에도 모나리자는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같은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아름다운 정원사'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라파엘로(1483~1520)의 성모자상이 모나리자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빈치의 작품만 놓고 보더라도 '암굴의 성모'가 더 대접받았다.


오늘날 모나리자는 그림이 아니라 아이돌 스타같은 존재다. 루브르를 찾는 연간 1000만명 가운데 25%가 오직 이 그림 하나만 보고 간다.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이 벌어지자 루브르는 2005년 모나리자에 특별히 넓은 전시실을 배당했다. 한꺼번에 450명이 입장할 수 있는 방이다. 모나리자는 이중 방탄유리에 싸여 전시돼있다. 같은 방에 티치아노, 틴토레토의 걸작이 걸려 있고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그림인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잔치'가 웅장함을 뿜어내지만 주의는 그다지 끌지 못한다. 관객은 오로지 모나리자 앞으로 돌진할 따름이다.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두 벌의 모나리자' 둘 다 다빈치 진품이라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1503~1506년, 77x53㎝, 루브르 미술관(왼쪽),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추정,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16세기 초, 84.5x64.5㎝, 개인 소장(오른쪽)

모나리자의 신화는 19세기 후반 형성됐다. 지금은 미술비평이 역사학·철학·사회학 등 인접 학문의 연구 성과도 받아들여 정교한 학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미술비평이 처음 태어난 19세기 중반에는 작가나 시인의 인상비평이 활개를 쳤다.


프랑스의 시인 테오필 고티에, 낭만주의 역사가 쥘 미슐레는 현란한 글솜씨로 모나리자를 유혹적이고 신비한 여인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고티에는 살았을 때 시보다 미술비평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로 중산층의 예술 취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랏빛으로 그늘진 입술' '스핑크스 같은 여인' 등 그의 미사여구로 모나리자는 신비에 쌓인 팜파탈로 변신했다. 미슐레도 "그림이 나를 집어삼킨다"는 둥 정서적 반응을 과장되게 기술했다.


실증주의 역사가 이폴리트 텐이 이런 식의 작품 해석은 근거 없는 것이며 지나치게 감성적이라고 제동을 걸었지만 소용 없었다. 유혹적인 팜파탈이라는 주제는 독자의 구미에 맞았다. 고티에와 미슐레는 당대의 명문장가였기 때문이다.


통속 소설가들도 가세했다. 이들은 모나리자와 다빈치 사이의 애정 관계를 지어내고 남편을 멋 없는 남자로 만들었다. 아내에게 사랑을 표시하고 자기의 성공도 과시할 겸 초상화를 주문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모나리자는 날로 유명해졌으나 20세기 초까지도 그 명성이 제한적이었다. 신문과 소설을 읽고 미술관에 드나드는 사람이 대개 중산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이 몰려오고 있었다.


1911년 루브르에 도둑이 들어 모나리자를 훔쳐갔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를 대중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언론은 연일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음모론까지 부풀렸다. 대중은 미술관에 찾아와 빈 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루브르 앞에서는 행상인들이 복제품과 엽서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나리자는 1913년 말 피렌체에서 발견돼 국민적 환호 속에 돌아왔다. 대중이 문화소비에 뛰어들기 시작할 무렵 벌어진 이 사건으로 모나리자는 경쟁을 불허하는 최고 작품이자 미술의 아이콘이 됐다.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모나리자의 작품성에 대해 말하길 꺼리는 경향이 있다. 너무 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도 모나리자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두 벌의 모나리자' 둘 다 다빈치 진품이라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 1512년경, 33x21.3㎝, 왕립 도서관, 이탈리아 토리노(이 그림 속의 노인은 정형화한 현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다빈치가 그렸으나 자화상인지는 불분명하다.)

1913년 영국의 미술품 감정가 휴 블레이커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손에 넣었다. 초상화는 블레이커의 스튜디오가 있던 장소의 이름을 따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블레이커는 헨리 퓰리처라는 수집가에게 이 그림을 팔았다.


퓰리처는 1960년 '모나리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저서를 통해 이 그림이 다빈치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퓰리처의 주장을 요약하면 두 벌의 모나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빈치가 주문자 조콘도에게 납품한 한 벌과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갖고 있다 프랑스 왕실 컬렉션에 포함된 또 한 벌.


이런 주장이 나오자 사람들은 정작 모나리자의 실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신비한 미소가 어떻고, 스푸마토 기법(회화에서 색과 색 사이 경계선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하는 기술적 방법)이 어떻고 하는 얘기만 무성했던 것이다.


모나리자를 최초로 언급한 문헌은 '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전(1550년 초판 출간)'이다. 바사리는 다빈치보다 한 세대 후에 살았던 인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 200명의 간단한 전기와 작품 활동을 정리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전'에서 모나리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빈치는 조콘도를 위해 그의 처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4년 이상 고심하면서 그렸지만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은 현재 프랑스 프랑수아 왕의 소장품이며 퐁텐블로에 있다." 19세기까지 사람들은 이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까지 썼으면 무난했을 텐데 바사리는 설명을 덧붙였다. "속눈썹은 섬세하기가 비길 데 없으며" "눈썹의 털은 여기는 빽빽하게, 저기는 좀 성기게" 표현돼 있어 너무나 자연스럽다 등등. 그런데 모나리자에는 눈썹이 없다. 이탈리아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19세기 프랑스 작가 스탕달도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에게 눈썹이 없다니 이상하다"고 불만을 토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바사리는 모나리자를 보기는 했던 걸까. 아니면 아일워스의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진품이라고 주장한 퓰리처의 말대로 또 다른 모나리자가 존재하는 걸까.


퓰리처는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진위 논쟁의 결말조차 못 보고 1979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림은 자취를 감췄다. 모나리자는 모방작과 복제화가 엄청 많았던 그림이라 그렇게 넘어가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이 2008년 익명의 스위스 사업가가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를 손에 넣었다. 그는 이 그림이 진품임을 증명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다. 이윽고 2012년 스위스 취리히의 모나리자재단 이름으로 그림을 공개함과 동시에 이 그림은 다빈치가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실린 저서도 출간했다. 이후 전문가들이 이 떡밥에 달려들었다. 결론은 다빈치의 진품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반질반질한 모나리자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난들 어찌하랴.



예술사 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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