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사회 원로의 현실 진단
"국민이 여소야대 만들어준 이유는
대통령·야당 권력 나눠 협치하라는 것"
노동·규제·사회기득권 개혁 시급 당부
"협치해서 해결해야 할 것을 결국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점을 정치인들이 뼛속 깊이 반성해야 한다."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7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 현실에 관한 안타까움을 전했다. 1936년 2월생으로 만 89세인 그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경험한 증인이다.
사회의 어른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박승 전 총재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금융은 물론이고 경제와 정치, 사회 등 주요 분야에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시대정신을 전할 혜안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다. 100세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원로가 현실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지금은 위기 상황이다. 격동의 역사, 바로 그 길목에서 그의 조언과 당부는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잡이다. 담담하게 전하는 북한산에 관한 언급과 건강에 대한 이야기에도 후배 세대들이 경청해야 할 교훈이 녹아 있다.
"북한산 기슭에 있는 국립 4·19 묘지는 지금도 자주 찾는 장소다. 서오릉과 함께 가장 사랑하는 산책코스다." 박 전 총재는 4·19 묘지 주변의 산책 코스를 매일 30분씩 걸어 다니며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해 생각한다.
박 전 총재는 흰머리만 늘었을 뿐, 눈빛은 현역 시절 그대로다. 박 전 총재는 "1960년, 4·19 때 서울 상대 졸업반이었던 저는 500~600명에 이르는 학생 시위대 맨 앞줄에 서서 데모했다"면서 "그날의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고 참여한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4·19 묘지를 산책할 때면 영령들을 위로하고, 비석 하나하나 돌아보며 묻혀 있는 지인들을 떠올린다. 학창 시절 은사를 비롯해 김주열 열사, 당시 고려대 상과대 학생위원장이었던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등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비린내 났던 그날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총격을 당한 학생들이 옆에서 피를 흘리면 그들을 부축해 차에 싣고, 학생들이 피 흘리는 모습에 흥분해서 중앙청(지금의 경복궁역 근처)으로 몰려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박 전 총재는 "국립 4·19 묘지는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권력에 맞서다 희생된 자들이 안장된 만큼 나에게는 특별한 장소"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12·3 비상계엄 사태가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국민들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여소야대’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여소야대는 어느 나라나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있던 일이다. 국민들이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것은 대통령과 야당이 권력을 나눠 협치를 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야당과 협치를 하지 않았고, 영수회담도 총선 패배 후 겨우 하지 않았나. 이 자체가 문제의 심각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계엄사태로 우리 경제는 성장·투자·국민생활 모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조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머지않아 국가 신인도 평가가 하향 조정되고 경제도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빠질 것이다. 대통령 권력을 분산하는 방향으로 개헌이 돼야 한다.
-계엄 사태 이후 사회가 더욱 분열되고 있는데,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분화되고 있는 밑바탕의 첫 번째 요인은 남북분단이다. 두 번째는 사회의 양극화인데 빈부·지역·세대격차 심화 현상이다. 최근에는 정치적으로 좌우 극단 세력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유럽을 비롯해 서구에서는 나치 세력과 같은 극우 정당이 득세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비슷한 극우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우리나라 장래를 생각한다면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서로 교대하면서 집권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양극화, 특히 빈부격차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국민 통합을 위해 정치적·사회적으로 노력해서 극단 세력이 커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와 함께 남북 간의 긴장완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남북의 극단적 대립 상황에서는 우리나라 안정과 평화 보장이 어렵고, 사회 통합을 유지하기 어렵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인가.
▲가령 무자비한 깡패가 있다면 그 깡패와 전면 대결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깡패가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 북한은 남한을 도울 힘은 전혀 없지만, 남한의 발전을 가로막을 힘은 무한히 가지고 있다. 남한이 절대적으로 소득 측면에서 북한을 압도하기 때문에 북한은 시간이 지나면 자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은 북한과 평화유지가 되는 방향으로 관리해야 하고, 경제적으로 북한에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에 대해서 일절 대화를 단절하고 남북 간의 극한 대립을 해서 북쪽이 통일과 민족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왔는데 이런 강경대응을 했다고 해서 북한이 핵개발을 중지했나. 오히려 더 촉진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구조개혁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크다. 어떤 개혁이 최우선으로 필요한가.
▲협치를 바탕으로 한 정치개혁뿐만 아니라 노동·규제·사회기득권 개혁이 시급하다. 지금 개혁해야만 한국 경제가 성장과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개혁에 있어서 야당의 협조가 꼭 필요하다. 노동개혁은 기업이 불가피할 때 해고할 수 있도록 미국처럼 노동시장 유연화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젊은이들의 신규 고용기회가 열린다. 규제개혁은 생산, 투자 모든 면에서 규제를 제거해야 하는데 진전이 전혀 없다.
과감한 개혁에 있어서 기업이 성장과 투자를 하는 데 제약이 없도록 해야 한다. 사회적 기득권 해체 문제는 대표적인 것이 의료부분이다. 의사들의 기득권이 워낙 강해서 국민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의료개혁이 점진적이 아니라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하려고 했다는 점, 의료계와 국민과의 대화를 거치지 못했다는 점, 야당과의 협조를 소홀히 했다는 점 등 문제점이 있지만 윤 대통령 충정은 옳았다고 본다. 만약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소위 의료 부분의 기득권을 해체해야 한다는 기본 방향은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오래전부터 부동산 문제를 지적해 왔다. 주거 안정을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한국 경제의 최대 과제는 부동산 문제다. 중장기적으로 집값이 크게 상승할 가능성은 없다. 이것은 기회다. 첫째 지속적으로 공급을 늘리고, 수도권을 그린벨트를 해제해서라도 적극적으로 공급을 늘려야 한다. 두 번째는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부동산 보유 과세는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부동산 보유과세를 강화해야 할 이유는 주택에 대한 가수요를 제거하고,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다.
소득세보다는 자산에 과세를 해야 한다. 앞으로 한국은 자산에 과세를 늘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집값이 하향할 때 정부가 절대 경기부양정책을 써서는 안 된다. 이 세 가지만 지킨다면 10년 내 절반으로 집값이 떨어질 것이다. 우리나라 문제는 빈부격차이고, 저출생 문제도 결국 부동산이 원인이다.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저성장 고착화를 피하기 위한 해법이 있다면.
▲지난 30년 동안 일본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0.7%로 장기침체기였다. 한국은행 추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앞으로 20년 뒤엔 0.6%로 일본의 0.7%보다 낮아져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 과감한 구조개혁 없이는 탈출이 어렵다. 우선 생산노동력 감소를 막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출산율을 높이는 것과 이민을 개방하는 정책 두 가지가 있다. 과학기술 입국정책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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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정 기자 s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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