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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난징대학살
최종수정 2019.12.13 18:28기사입력 2019.12.13 10:40
[에세이 오늘] 난징대학살

중국인 30만 명이 1937년 12월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난징을 점령한 다음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 포로뿐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내 성 외곽이나 양쯔강 하구에 모아 놓고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당시의 일을 전하는 기록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어 차마 말이나 글로 옮기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른바 난징대학살.


일본군은 포로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다. 수없이 많은 중국인이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 표적이나 목 베기 내기의 희생물이 되었다. 산 채로 파묻히거나 칼부림에 난도질당하기도 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세워 놓고 몸에 석유를 부은 다음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어 시체더미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에세이 오늘] 난징대학살

'인간 사냥'은 여성들에게 더욱 혹심했다.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ㆍ강간한 뒤에 죽임)'은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한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한 일본군의 일기가 전한다. 그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일로 무료함을 달랜다.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고 적었다.


[에세이 오늘] 난징대학살

난징의 자금산 기슭에서는 일본군 소위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일본도로 중국인 목 베기 내기를 했다. 1937년 12월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이 보도한 '100인 참수 경쟁'이다.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기사를 송고한 기자 아사미와 스즈키가 두 사람의 살인내기를 촬영할 때 무카이는 106명, 노다는 105명을 죽인 뒤였다. 그러나 누가 먼저 100명을 죽였는지 몰라 먼저 150명을 죽인 자를 승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1938년 1월, 히로다 고키 일본 외무대신이 주미 일본대사관에 비밀 전문을 보낸다.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 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히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의 서방 외교관들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매수를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 장쑤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는 2000년부터 10년 동안 세계를 누비며 난징대학살에 관한 1차 사료를 모아 집대성한 총 78권 규모의 '난징대학살 사료집'을 2011년 7월6일 완간했다. 본 사료집 72권, 부록 6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글자 수는 4000만 자나 된다. 역사서 '사기'(50만 자)의 80배, '자치통감'(300만 자)의 13배에 이른다. 사료집은 난징대학살이 일본 군부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증명한다.


난징대학살은 역사적 사실로 대부분 확인됐다. 이 사건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 난징대학살의 실체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 둘째 전쟁수행 중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이며 희생자 수도 몇 만 명에 불과했다는 시각. 셋째 난징대학살은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가 날조한 거짓으로 전혀 근거가 없고 증거 사진들도 모두 조작되었다는 주장. 일본의 태도가 이러하니 참회와 사죄, 용서에 이르는 길은 멀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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