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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날엔…] DJ 대통령 당선 결정타, 호남과 수도권이 아니었다?
최종수정 2019.06.15 13:13기사입력 2019.06.15 09:00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선, 역전의 역전 드라마…김대중 후보, 충청에서 이회창 후보 압도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정치, 그날엔…] DJ 대통령 당선 결정타, 호남과 수도권이 아니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을 함께 경험하는 것은 설렘과 낯섦의 공존으로 이어졌다. 제15대 대통령선거에 대한 얘기다. 1997년 12월18일 그날의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하나의 사건이었다.


외환위기라는 국가적인 재난 상황에서 집권 세력의 신뢰도는 크게 떨어졌다. 당연히 집권 여당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하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있었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국민의 힘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룬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맞물려 있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네 번째 도전이었다. 강고한 지역감정의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평생 그를 옥죄던 색깔론의 굴레도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집권 여당은 정치인 이회창을 내세웠다. 김영삼 대통령과 차별화에 나섰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국무총리와 감사원장을 지내면서 ‘대쪽’ 이미지를 쌓았던 검증된 정치인이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차세대 리더로 손꼽히던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의 등장이었다.


대선은 삼파전이었다. 15대 대선은 혼탁했다. 김대중 후보 승리 가능성이 커지면서 더욱 치열한 승부가 이어졌다. 흑색선전도 난무했다. 대부분 색깔론과 지역 비하가 담긴 내용이었다. 선거 당일까지 거리에는 출처불명의 흑색선전 전단지가 뿌려졌다.


[정치, 그날엔…] DJ 대통령 당선 결정타, 호남과 수도권이 아니었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지난 1월2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앞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액자 명판식을 갖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김대중 후보는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정치적인 경륜과 국정철학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적임은 자신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인구 구성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당시는 특정 지역 몰표가 당연하게 인식되던 시절이다. 영남 인구는 호남 인구보다 훨씬 많다. 영남에서 저조한 득표율을 올릴 경우 대선 승리는 사실상 어려웠다. 한나라당은 자신감이 있었다. 단 한 번도 투표를 통해 권력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역사가 자신감의 배경이었다.


대선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이어졌다. 실제 선거도 그런 결과로 이어졌을까. 개표함을 열기 시작하자 주요 대선후보 캠프의 표정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초반 개표 결과는 예측과 달랐다. 이날 오후 7시30분께 첫 개표가 이뤄졌는데 이회창 후보 70%, 김대중 후보 10%로 출발했다. 전국 주요 지역 중 경북 포항에서 첫 개표함이 열렸기 때문이다. 김대중 후보는 대구 경북과 부산 울산 경남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확연하게 밀렸다.


[정치, 그날엔…] DJ 대통령 당선 결정타, 호남과 수도권이 아니었다? 지난해 6월 24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 빈소를 찾은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조문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개표 초반에는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다. 어느 지역 개표함이 열리느냐에 따라 1위 자리는 바뀌었다. 오후 9시가 넘어가면서 이회창 후보의 우세가 이어졌다.


여론조사 기관의 선거 예측이나 정치권의 예상과 실제 투표 결과는 다른 것일까. 여의도 정가는 불안과 초조, 기대가 교차했다. 사실 1997년 대선은 선거운동 시작부터 투표일 당일까지 혼돈의 시간이었다. 누구도 당선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오후 11시가 다가오면서 김대중 후보가 힘을 받았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수도권 지역의 개표함이 본격적으로 열리자 이회창 후보와의 접전 양상을 조금씩 우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12월19일 오전 4시가 다 될 무렵 김대중 후보는 1000만표 득표를 돌파했다. 대한민국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이인제 후보가 부산, 경남 등에서 이회창 후보의 표를 잠식하면서 김대중 후보에게 유리한 구도가 형성됐다.


하지만 영남의 표심은 김대중 후보에게 냉랭했다. 최종 개표 결과를 보면 경남에서 11.04%, 대구에서 12.53%, 경북에서 13.66%, 부산에서 15.28%를 득표했다. 수도권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영남에서 이 정도의 득표율로 대선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정치, 그날엔…] DJ 대통령 당선 결정타, 호남과 수도권이 아니었다? 1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영정을 든 고인의 차남인 홍업 씨의 장남 종대 씨를 선두로 운구행렬이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호남은 김대중 후보에게 몰표를 안겨줬다. 광주는 97.28%, 전남 94.61%, 전북 92.2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김대중 후보를 통해 ‘호남의 한’을 풀어달라는 민심이 기록적인 득표율로 이어졌다.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호남의 몰표와 수도권의 우위를 토대로 이뤄졌다는 게 정설이지만 사실 충청의 승리가 없었다면 당선은 불가능했다.


대전은 김대중 후보 45.02%, 이회창 후보 29.17%의 득표율을 보였다. 충북은 김대중 후보 37.43%, 이회창 후보 30.79%를 기록했다. 충남은 김대중 후보 48.25%, 이회창 후보 23.51%의 득표율로 나타났다.


김대중 후보는 충청권에서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뒀다. 이는 DJP 연합의 정치적 연대 효과 때문이다. 충청의 맹주로 평가받았던 정치인 김종필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는 얘기다.


전국적인 최종 득표율은 김대중 후보 40.27%(1032만6275표), 이회창 후보 38.74%(993만5718표)로 나타났다. 두 사람의 득표율은 1.53%(39만557표) 격차를 보였다.


김대중 후보는 대전에서 10만8227표, 충남에서 24만7636표, 충북에서 5만2456표 등 40만8319표를 이회창 후보에게 앞섰다. 만약 충청권에서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이 비슷하게 나왔다면 대선 승자는 바뀌었을 것이란 얘기다.


김대중 후보는 호남과 수도권의 표심을 토대로 대선에서 승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수성향이 강한 충청권에서의 승리가 청와대의 마지막 문턱을 넘는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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