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시간여행]17세 김주열과 15세 진영숙, 대한민국 정치사를 바꾼 두 10대 이야기
우리나라는 선거법상 19세 이상의 국민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일본은 올 7월 참의원 선거부터 '18세 투표권'이 인정된다. 투표 연령을 18세로 낮추는 세계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도 10대로 투표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데, 일각에선 10대의 정치적 판단 미숙을 이유로 우려를 표명한다.
현재 한국에서 만18세의 경우 결혼, 취업, 군 입대, 운전면허 취득, 9급 공무원지원, 법정대리인 동의서 없는 여권 신청, 신용카드 발급, 모든 상영등급의 영화관람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다만 대선과 총선에 투표만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과연 18세는 정치적인 의사결정을 하기엔 부적절한 나이인가. 지난 역사적 경험을 잠깐 돌이켜보자.
▶ 어머니에게 긴급히 날린 여중생의 쪽지유서
진영숙은 15세 소녀였다. 한성여중 2학년.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홀어머니와 살았다. 1960년 4월19일 화요일, 영숙은 서울 성북동 삼선교에 있는 학교에서 동대문시장 인근 집으로 급히 귀가했다. 어머니에게 할 말이 있어서였다. 그때 학교 친구들이 50여명 같이 따라왔다. 마침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 집을 비웠다. 잠시 기다렸으나 어머니는 오지 않았고, 딸은 쪽지를 남겼다.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길,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쪽지는 유서가 되고 말았다. 진영숙은 4.19 사망자 명단 속에 들어있다.
▶ 합격자 발표를 보러간 소년이, 바닷속에서 떠올라
중학교 농구선수를 했던 소녀. 키가 크고 활달했던 영숙이 동료 여중생들을 이끌고 미아리의 시위장으로 달려나갔던 이유는, 17세 소년 때문이었다.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합포만 신포동의 중앙부두에 떠올랐다. 당시 부산일보 마산주재 기자 허종이 이 사진을 찍었다. 4월12일자 1면에 김주열의 참혹한 주검이 큰 사진으로 보도됐고 이 뉴스는 전국을 넘어 세계를 놀라게 한다.
김주열은 17세였다. 마산상고(현 용마고등학교) 합격한 직후에, 정권의 투표조작 불의를 못 참고 3.15 부정선거 규탄 마산시위에 참여했다. 그뒤 행방불명 되었다가 근 한달만에 바다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 4.19때 어머니들이 정권퇴진을 외친 까닭
영숙은 김주열 관련 신문기사를 보고는 "공산당 나쁘다더니 공산당 같은 짓을 한다"고 말하며 엎드려 울었다. 4.19 시위에 나가던 날 아침, 영숙은 어머니에게 "고등학생들이 안나가면 중학생이라도 나가 싸울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처음 외친 사람은 어머니들이었다. 17살 아들을 잃은, 김주열 어머니 권찬주의 오열이 이 땅의 모성을 진동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 4.19 때 사망자와 부상자는...
1960년 4월 21일자 조선일보 호외에는 사망자 숫자와 명단이 실렸다. 학생측 주장은 111명 사망 561명 부상, 경찰측 주장은 4명 사망 169명 부상. 이후 집계된 전국 사망자는 186명이며 부상자는 6026명이다. 4.19 묘지 제1묘역에 묻힌 사람은 216명으로 나와 있다. 이 묘역은 당시 사망자가 대부분이나 그날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가 돌아간 분들도 포함되어 있다. 4.19 부상자로 사망한 이들이 주로 묻힌 제2묘역엔 101명이 안장되어 있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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