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극장 '련(蓮), 다시 피는 꽃'…'도미부인'과 '되살이꽃' 설화가 만나 궁중로맨스로 재탄생
전통사상 '극복' '소생' 스토리에 투영
한국무용 어우러져 뮤지컬 보듯 친숙
첫 궁중연희 장면부터 관객시선 뺏어
정동극장서 오는 10월29일까지 공연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백제 개루왕 시대에 살던 평민 도미에게는 외모가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도미의 아내는 용모 뿐 아니라 지조 있는 행실로 두루 칭찬을 받는 여인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개루왕은 계략을 짜 도미의 아내를 취하려한다. 그러나 도미의 아내는 지략을 발휘해 위기를 탈출하고, 이후 천성도에서 눈 먼 남편을 만나 남은 생을 함께했다.(삼국사기에 실린 '도미설화')
여성의 정절(貞節)과 부부간 사랑을 서사화한 도미부인 설화가 조선시대 왕실을 배경으로 한 전통무용극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정동극장(극장장 손상원)이 2017 전통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올린 '련(蓮), 다시 피는 꽃'에서다.
정동극장은 도미부인 이야기에 제주도 굿에서 구연되는 서사무가 '이공본풀이(억울하게 죽은 어미의 생명을 서천꽃밭 되살이꽃으로 되살린다)' 설화를 덧붙여 현대판 러브스토리를 완성했다. '극복'과 '소생'이라는 한국적 사상을 사랑 이야기에 투영한 것이다. '연담가'와 '헌화가' 등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통설화 속 노랫말을 인용한 곡과 한국 무용이 어우러진 공연은 한 편의 뮤지컬드라마를 보듯 친숙한 느낌으로 젊은 관객층의 눈높이를 맞췄다.
왕과 왕비가 자리한 가운데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축제가 시작된다. 악(樂)과 무(舞)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나기로 소문난 무희, '서련(이하 련)'의 화려한 춤사위가 시작되자 왕은 꽃 같은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이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왕비는 서련을 궁 밖으로 내쫓는다. 예(禮)와 무(武)가 출중한 궁 제일의 장군 '도담'은 련을 연모하고 서련 역시 자기의 마음을 도담에게 고백한다. 달빛 아래서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 그러나 련을 다시 궁으로 데려가려는 왕의 군사와 이를 막으려는 도담의 결투가 벌어지면서 극은 위기로 치닫는다.
'흔하디 흔한 사랑이야기'일 것이라는 편견은 첫 궁중연희 장면부터 사그라든다. 느리거나 빠른, 무겁거나 섬세한 춤사위. 각 장면을 이끌어가는 한국 무용이 주는 신선한 충격 때문이다. 나라의 태평성대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왕과 왕비가 직접 추는 '태평무'는 화려함과 위엄을 동시에 갖췄다. 이어 등장하는 칼을 도구로 한 전통춤 '검무'와 제례의식 때 행해진 '일무', 일사불란하게 변하는 춤의 배열, 이와 어우러지는 타악 장단은 보고 듣는 이들의 마음을 지루할 새 없이 쥐고 흔든다.
극 초반 련이 해금 연주를 선보이는 장면에서는 춤과 연주곡, 배우의 연기가 균형을 이뤄 실제로 연주하는 느낌을 준다.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바뀌는 무대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의상, 다채로운 색감의 조명 연출도 감각적이다. 특히 권력 앞에서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연인의 마음은 련과 도담의 노래 '연담가(蓮擔歌)'로 더 쉽게 전달된다.
'말로 할 수 없어도 알 수 있는 것/ 만질 수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것/ 이미 오랜전에 정해진 듯/ 그대 향해 흐르는 나의 마음/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것/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것/ 나를 찾아 헤매는 그대 마음/ 나를 부르는 그대 사랑/ 우리 서로를 바라보는 여기/ 우리 서로를 부르는 지금/ 나 가는 길/ 낯 설고 험하여도/ 어둠 속에/ 갈 길 몰라 헤매어도/ 그 길은 우리 둘/ 하나 되는 길.'
권력 앞에서 스러진 두 사람. 이 서글픈 사랑은 무당 '모화'가 련의 소생의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전환을 맞는다. 모화는 한 생명을 소생시키기까지의 과정을 천천히 의식적인 몸짓으로 풀어내 그간 빠르게 전개되던 관객들의 호흡을 일순간 정지시킨다. 영화 클로즈업 화면처럼 눈앞에 펼쳐진 련의 부활은 모두의 염원이 실현되는 순간이자 작품의 하이라이트이다.
안무와 연출을 맡은 김충한은 지난 18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모화의 소생의식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아름다운 것을 살리려는 의지, 즉 생명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장면에서 오고무 등을 무대 전면에 배치하고 군무와 함께 악기 동선을 바꾸는 등 타악 연주를 강하게 활용했다. 사람의 심장소리와 가까운 타악의 울림을 통해 관객들 역시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소생의식에 동참할 수 있다. 그는 "한국 춤의 깊이와 무게감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라면서 "극적 의미와 볼거리 모두 놓치지 않음으로써 우리 전통무용의 매력을 최대한 담아냈다"고 했다.
대본을 쓴 박춘근은 작품의 모티브 선정에 대해 "여러 설화 중 여성캐릭터를 재발견하고 싶다는 목표에서 도미부인 설화를 차용했다"면서 "도미부인의 당당함과 강인함, 여기에 되살이꽃 설화를 더해 생명을 향한 강렬한 소망과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피어라 다시 피소서/ 시든 어제 다 잊고 오늘이 그날이니/ 지금 여기 백백홍홍 만발하고 난만하여/ 산천초목 새 강산 이루어라/ 피어라 다시 피소서/ 어둔 밤 지나 새날이 밝아오니/ 이제 다시 저물지도 기울지도 마시옵고/ 태평성대 새 세상 펼치어라.'
헌화가 한 자락에 달뜬 마음은 련과 도담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 백년가약 장면에서 환하게 누그러졌다. 동서고금, 사방에 널린 게 사랑이야기지만 어느 새 자세를 곧추세우고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관객들을 본다. 박지연ㆍ조하늘ㆍ고유정ㆍ김수민ㆍ김슬기ㆍ김영은ㆍ김예지 등 30여명이 출연하고 권두희ㆍ이용준ㆍ이창현ㆍ전중영이 타악연주를 맡았다. 오는 10월29일까지 정동극장에서 공연한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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