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김민영 기자]지난 8일 오전 화창한 봄날임에도 서울 서대문구 서연중학교 앞은 비장함과 긴장감만 가득했다. 청년 구직자들이 너도 나도 선망하는 직업인 '지방직 9급 공무원시험'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잔뜩 얼굴이 굳은 공시생들은 트레이드 마크인 츄리닝(트레이닝) 바지에 후드티를 입거나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속속 시험장에 입장했다. 교실 안에서 공시생들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지 않기 위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를 하는가 하면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는 등 정신을 집중하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응원하러 온 가족ㆍ친구들도 초조하긴 마찬가지, 운동장을 서성이거나 벤치에 앉아 기도를 하는 등 애를 태웠다. 공무원시험 3수에 도전한 28살 아들을 응원하러 온 김영규(66ㆍ경기 안양시 거주)씨는 "어릴 때부터 계속 공부를 해왔는데 노력한 만큼 결과가 안 나와서 안쓰럽다"며 "아들이 빨리 결혼하고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잡아야 하는 데 굉장히 초조하고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실업자 100만명, 청년층 실업률 10%대 시대, 너도 나도 안정적 일자리를 위해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2017년 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젊은이들은 안정된 고용과 고임금을 보장해주는 정규직 일자리가 갈수록 줄고 비정규직ㆍ'알바'로 생계를 이어야 하는 현실에서 국가가 고용ㆍ임금을 보장해주는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공시 열풍은 이른바 공시 폐인 양산 등 수험생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자원의 심각한 낭비를 초래하고 있고, 시험 방식ㆍ문제도 능력있는 인재를 뽑기에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 늘어나는 공시생 = 지난 2011년 이후 과거 노동시장을 떠받치던 제조업ㆍ서비스 등의 신규 취업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청년 실업자들도 급증하고 있다. 서비스업의 신규 취업자 수는 2011년 37만9000명에서 지난해 약 33만명으로 감소했고, 제조업도 2015년 15만6000명에서 지난해 15만명대로 5000명 이상 줄었다. 전체 신규 취업자 수도 2011년 약 41만5000명에서 지난해 29만9000명으로 급감했다.
반대로 30세 미만 청년실업률이 급증하고 있다. 15~29세 실업률은 2011년 7.6%에서 2016년 9.8%로 늘어났고, 올해는 10%대를 돌파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공식 통계상 실업자 수는 올해 3월 기준 100만명 가량이지만, 일부 경제연구소들은 실제 각종 시험 준비로 구직대기중인 청년 실업자가 400만명을 넘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취업 자체가 줄었을 뿐만 아니라 질도 나쁘다. 통계청의 2015년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기업들은 갈수록 신입 채용 대신 경력직원 또는 비정규직 채용을 늘리고 있다. 기업의 경력직원 채용 비중은 2011년 19.7%에서 2015년 27.1%까지 늘어났다. 서비스업에서도 신규채용 10명 중 7명은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같은 현실은 '공시생'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저런 시험을 합쳐 최대 100만명 안팎으로 추산될 정도다. 각종 공무원시험 응시자수는 매번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국가공무원 9급 응시자수는 2011년 14만3000명에서 올해 22만8000명으로 늘었고, 7급도 5만7000명에서 6만7000명으로 증가했다.
지방직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실시된 지방공무원 7급 시험엔 서울을 빼고도 3만3548명이 몰려 무려 122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같은해 6월 실시된 지방공무원 9급 시험에도 21만2000여명(서울 제외)이 몰렸다. 노량진 공무원 학원가 등에서 '3년은 필수, 5년은 기본, 7년은 선택'이라는 말마저 나돈다.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이모(24)씨는 "대부분의 대학 동기ㆍ선후배들이 대학 1학년때부터 졸업 후에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친구들도 1년에 한 두번 만 만나고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전까지 공부만 해도 합격이 어렵다. 역대 최대 인원 응시ㆍ경쟁률 같은 기사는 기분이 나빠서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공시 열풍'의 그늘 = 안정된 고용이 보장된 공무원 시험에 젊은이들이 열을 올리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한 선택일 수 있지만, 사회에 미치는 역풍도 만만치 않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공시의 경제적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공시생의 숫자를 2016년 청년층 비경제활동 인구 498만명 중 5.2%인 25만7000명으로 한정하고 1인당 약 1800만원의 비용을 지출한다고 가정할 때 사회 전체적으로 21조7689억원 가량의 경제적 손실(생산ㆍ소비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여기에 공무원시험 산업 자체로 인한 긍정적 경제 효과(순기능적 지출)는 4조6260억원에 그친다. 결국 우리 사회는 공시 열풍으로 인해 2016년 한해에만 17조1429억원의 경제적 손해를 봤으며, 이는 명목국민총생산(GDP)의 1.1% 규모에 해당된다.
오준범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공시생이 증가하게 된 근본원인은 질좋은 일자리의 절대 부족이고, 책임은 전적으로 사회에 있다"며 "우수한 인재들이 시험 준비에 능력을 집중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생산과 소비에서 큰 규모의 경제적 기회비용이 발생하며 인적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을 악화시키고 중기적으로는 경제적 성장 잠재력까지 저하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간 부문에서 좋은 일자리가 많이 창출될 수 있도록 규제 완화와 세제 혜택을 늘려야 하며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업종을 신성장동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 공무원 시험 제도 자체의 문제점도 지적된다. 암기ㆍ지식 과목 위주의 시험이 수십년째 유지되고 있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인재를 뽑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23개국 공공 업무능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핵심 정보 처리 역량의 항목인 '언어 능력', '수리력', '컴퓨터 기반 문제 해결력' 등에서 평균에 못 미쳤다.
'안정된 일자리'만 바라 보고 공무원을 선택한 이들이 늘어나면서 이전보다 책임감ㆍ사명감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지난 2월 국민 1000명을 상대로 조사해 발표한 '행정에 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중 62.1%가 "공무원들이 무사 안일하다"고 답변했고, 그 원인으로는 사명감 부족(18.2%)을 가장 많이 꼽았다. 공무원 스스로의 평가도 안 좋다.
한국행정연구원이 비슷한 시기 공무원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 결과 '공무원이 무사안일하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 50%에 가까웠다. 그 원인에 대해선 "열심히 일해도 보상이 미흡해서"라는 답이 23.5%로 가장 많았다.
서울의 한 지자체 인사담당자는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신입사원들의 스펙은 좋아졌는데, 사명감과 책임감은 예전보다 확연이 차이가 난다"며 "면접을 강화해 인성테스트를 통해 거르는 시스템을 만들거나 시보 때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평가를 감안해 최종 합격시키는 등 채용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성원 군산대 교수도 "현행 공무원 채용제도는 지식ㆍ과목 중심의 평가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반면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배경으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하는 데 미흡하다"며 "헌법과 행정학을 기본과목화하는 한편 다양한 시험절차와 절차적 공정성을 기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김민영 기자 my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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