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로 돌아온 스칼릿 조핸슨
멜로·액션 넘나드는 천의 얼굴...차가운 기운 뿜으며 정체성 찾는 내면 연기
관능적 묘사만큼 섬세한 감정 표현도 수준급 "눈빛만으로 내면 전하고 싶어"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티셔츠 상표 좀 떼 줘요." "네." 영화배우 밥 해리스(빌 머레이)의 키는 188㎝. 샬롯(스칼릿 조핸슨)은 그보다 26㎝ 작다. 까치발을 하고 해리스의 목을 향해 손을 뻗는다. "키가 너무 크시네요." 해리스는 미안했는지 바로 의자에 앉는다. "당신이 너무 작은 건 아니고?"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웃는다. 농담이 계속되자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소녀처럼 재재거린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년)'에서 결혼 2년차인 샬롯은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 오지만 낯선 문화에 답답해한다. 남편에게서조차 안정을 찾지 못한다.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 해리스가 웃음을 찾아준다. 해리스가 샬롯의 소외된 심정을 이해하면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도쿄 시내를 함께 구경하기에 이른다. 그 채비를 하는 신에서 조핸슨의 얼굴은 매우 행복해 보인다. 시종일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는다. 실제로 일상의 꽉 짜인 틀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막 결혼한 여성 역을 맡았지만 불과 열여덟 살. 탭댄스와 노래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고, 열 살 때부터 매년 한 편 이상 작품에 출연했다. 수두를 덜 치료하고 학예회에 나섰다가 고열로 무대에서 쓰러질 만큼 욕심이 많았던 소녀. 어쩌면 서른네 살 연상의 배우 머레이에게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을지 모른다.
조핸슨은 '어벤져스(2012년)' 속 블랙 위도우처럼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하다. 지난 12일 TV 오락프로그램 '새터데이나이트라이브(SNL)'에 출연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맏딸 이방카 트럼프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이방카로 변장하고 가짜 향수 브랜드 광고에 등장해 페미니즘을 신봉하면서도 아버지의 여성비하 발언을 옹호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을 비판했다. 그녀는 아역 때부터 담대했다. '쥬만지(1995년)' 등 각종 오디션에서 탈락할 때마다 '자기들 손해지'라고 되뇌며 아쉬움을 털었다. 조핸슨은 열세 살에 출연한 '호스 위스퍼러(1998년)'에서 승마 사고로 정신적 충격을 입는 그레이스를 연기해 유명해졌다.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81)은 그녀의 연기를 보고 "서른 살 같은 열세 살"이라고 했다.
당시 조핸슨은 솔직한 표현으로도 주목받았다. 미국 연예 프로그램 '액세스 할리우드'에서 "주목할 스타로 부상하고 있다"라고 칭찬하자 "그런 표현은 별로"라고 했다. "일시적인 칭찬에 불과하잖아요. 훗날 예전에 인기 있었던 배우로 기억될 것 같아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요. 유명세나 돈은 필요 없어요. 앞으로 좋은 배역을 많이 하고 싶을 뿐이에요. 준비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어요. 지금은 명성 있는 영화인들과 작업해서 주목받고 있지만, 앞으로 영원히 배우로 남고 싶어요."
그녀의 말처럼 아역으로 얻은 인기를 성인까지 유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조핸슨은 메인 스트림에 매달리지 않고 독립영화에 출연해 난관을 돌파했다. 대중의 시선을 상대적으로 덜 의식하고 다양한 인물을 그려 연기 폭을 넓혔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속 샬롯도 그 일환이다. 풋풋한 얼굴로 인생의 의미와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 감정은 남편을 후쿠오카로 보내며 키스를 하는 순간에도 나타난다. 스웨터에 팬티만 걸친 채 침대에 앉아 짐을 싸는 남편을 바라보는데, "먼저 집에 돌아갈래?"라는 말에 웃음과 슬픔이 미묘하게 교차한다. 남편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진지해지자 그녀는 웃으며 "농담이야. 잘 다녀와. 나는 걱정하지 말고"라고 한다. 하지만 얼굴은 제발 남아달라고 호소하듯 애처로워 보인다.
섬세한 감정 표현은 해리스와 마지막 밤을 보내는 신에서도 드러난다. 호텔 바에서 마주앉아 서로를 쳐다보는데, 해리스가 긴 침묵을 깨고 손을 잡는다. "떠나기 싫어." 샬롯은 입꼬리를 여러 번 올리며 웃다가 이내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연다. "그럼 나랑 여기서 같이 살아요." 도발적인 대답에 해리스는 눈을 내리깔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이런 그를 계속 쳐다보는 샬롯은 웃고 있지만 조금씩 굳어간다.
조숙한 연기는 대중에게 관능적 묘사로 더 각인돼 있다. 이후 다양한 멜로 연기로 '섹시'라는 수식어가 붙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핸슨의 외모는 섹스어필과 거리가 멀다. 키가 작고 피부가 우윳빛이다. 배와 허벅지에 살집이 있어 미니스커트를 거의 입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섬세한 표정, 자신감 넘치는 연기로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우디 앨런 감독(82)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년)' 속 크리스티나가 대표적이다. 로맨스라면 고통도 달콤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을 능청스럽게 그린다. 화가인 후안 안토니오 곤잘로(하비에르 바르뎀)의 노골적인 유혹에 자신의 목, 입술, 머리 등을 오른손으로 만지며 눈웃음을 친다.
백미는 곤잘로의 호텔방에 찾아가는 신이다. 몸을 비비 꼬며 들어오는데, 그의 눈을 계속 쳐다보면서 양 팔꿈치로 벽에 기댄다. 자연스럽게 얼굴을 내밀며 "그래, 섹스하러 왔어"라고 한다. 와인을 건네받고 침대에 앉아 곤잘로를 마주하면서 행동은 더 과감해진다.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에 조금씩 얼굴을 내밀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바싹 갖다 붙인다. "어서 시작 안 하면 날 새겠다." 조핸슨은 성적 매력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했다. "섹시한 배역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섹스어필하는 매력이 필요하다면 그에 맞는 연기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음가짐, 표정, 외모 등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섹시한 캐릭터가 탄생한다."
캐릭터의 내면에 대한 고민은 영화 마흔네 편을 거쳐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의 미라 킬리언에 이르렀다. 동명의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기계의 몸에 인간의 자아를 가졌는지, 정신 또한 기계에 지배당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쿠사나기 모토코다. 어려운 상황들을 마주하는 것은 물론 자신과 자신의 사고방식에까지 의구심을 갖게 되는 난해한 배역. 조핸슨은 "그녀에게 주어진 인생과 선택하는 인생이 있다고 믿고 연기했다"고 했다.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일과 가장 인간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인 고립감이 연관이 깊다고 생각했다. 캐릭터를 탐구하면서 점점 현실처럼 나타나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 불편함에 대한 편안함이 나중에는 어렵게 느껴졌다."
조핸슨은 관객과 교감하면서도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 시종일관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면서 불안한 눈빛으로 철학적 고민을 던진다. 그녀는 눈빛만으로도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눈은 누군가와 영혼으로 대화할 수 있는 도구다. 더 많은 경험이 쌓인다면 불필요한 연기를 버리고 그런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눈이야말로 영혼의 창이니까."
※아시아경제는 미국 배우 'Scarlett Johansson'을 스칼렛 요한슨으로 표기해 왔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스칼릿 조핸슨으로 표기해야 옳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번 호부터 바로잡아 표기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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