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어들이 말하는 이른바 ‘비시즌’ 내내 보관했던 스키장비를 부푼 마음으로 정성스레 하나씩 꺼낸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 시즌도 어느덧 끝자락에 이르렀다. 매년 이맘때면 지나가는 시즌을 통째로 돌이켜 보게 된다. 물론 스키 타면서 즐거웠던 순간 순간을 회상하기도 하지만 때론 주목할 만한 여러 사건들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표면상 그저 스포츠나 레저로 간주할 법하지만 스키는 종종 나에게 세상살이에 대한 교훈도 선사한다.
매주 수요일 야간마다 이천의 한 소규모 스키장에서 내가 소속된 스키 동호회의 정기모임이 있는데, 얼마 전에 새삼 느낀 게 하나 있다. 스키를 들고 단골 스키어들이 휴식을 취하는 대기실로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나오려는 사람이 유리문을 열어서 잡아주었다. 흔한 일이다 보니 별생각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한구석에 모여 앉아 있는 동호회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앞서 받은 작은 친절함의 여운이 마음 한 구석에 살포시 남아 있는 걸 느꼈다.
정설장비들이 슬로프를 다듬는 오후 정설이 끝나고 야간운영 시간이 시작되자 중급자 리프트 탑승장 앞에서 줄을 섰다. 일행이 동일한 주황 완장을 차고 있는 걸 보곤 많은 스키어들이 자신들 뒤에 있는 몇 회원들이 앞에 있는 무리와 함께 리프트에 타도록 먼저 보내주었다. 옆 회원들과 잡담을 하느라 이 작은 배려에 대해서도 별 생각 없었다.
중급 슬로프에 오른 후 참석한 회원들이 다 모일 때까지 한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슬로프 중간쯤에서 한 초보자가 넘어지는 걸 목격했다. 그가 한번 구르면서 한쪽 스키가 신고 있는 부츠와 분리되어 버렸다. 이건 슬로프에서 흔한 일이다. 재주껏 일어나서 그저 스키를 다시 부착하면 그만이다. 그때 그 뒤에 오던 한 스키어가 멈추더니 스키를 주어서 애써 몸을 일으키고 있는 초보자 뒤에 놓아주었다. 이것도 흔한 광경이다.
친절한 스키어는 초보자 손을 잡아 일으켜 주더니 스키를 신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 같았다. 내용을 알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한 말을 할 테니까. “여긴 중급자 코스입니다. 위험하니까 익숙해질 때까지 초보자 코스에서 타세요.” 초보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친절한 스키어는 그제야 내려갔다. 이마저도 드문 상황이 아니었다.
얼마 후 나는 일행과 함께 상급자 슬로프로 이동했다. 이 슬로프는 아무래도 폭이 좁고 가팔라서 우리 회원이 아닌 다른 스키어들도 차례대로 한 사람 한 사람 내려갈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려줬다. 이 또한 무언의 합의 같은 상황이다.
한참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급기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맞다, 스키어들끼리의 배려와 존중이란 것이 분명 있다. ‘동지애’가 곁들여진 스키어들의 스포츠맨십이라고나 할까. 특정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고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을 중요시하게 받아들이는 어떤 그룹이든 마찬가지일 테다.
스포츠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2002년 한일월드컵 기간이 때때로 뇌리에 스친다. 그 당시 빨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일상이 질서와 배려, 매너의 유토피아처럼 느껴졌고 모든 이가 나의 동지였고 우리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세상에게, 우리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그 모습을 거의 잊고 살고 있지만.
그렇다. 나의 이웃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나의 동지다. 매일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들도 동지라는 의미.
오늘 당장 일상에서도 타인에게 먼저 문을 열어 줘야겠다. 그런데 이 느낌이 원고를 넘긴 후에도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케빈 경
잉글리시 컨설팅 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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