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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 N개의 시국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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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 N개의 시국선언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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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반 동안, 다양한 이들이 모인 다양한 형태의 시국선언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시국선언 자체로는 특별히 이슈가 되지 못한다.


필자도 세 건의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최초의 시국선언은 비교적 이른 시점에 나왔다. ESC(사단법인변화를꿈꾸는과학기술인네트워크)라는 다소 진보적인 ‘과학기술인’ 연대에서 한 일이었다. 과학기술인 500여명이 정치에 대해 이런 목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논문에 사용하는 ‘연구배경-연구방법-결과-결론’의 형식을 차용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선언문이 돌던 당시는 아직 힘의 향방이 가려지지 않을 때였다. 크든 작든 이름 걸고 사업이란 걸 하는 처지에, 잠시 망설인 게 사실이다. "찍히면 어쩌나" 그건 지난 40년 동안 단련된 본능이자 학습의 결과였다. 하지만 '동을 뜬'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워낙 강했다. 이런 이름들 곁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필자는 과학자도 공학자도 아니다. 박사도 교수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과학기술인’이라는 느슨한 이름으로 연대의 폭을 넓히고, 기꺼이 필자를 받아줬다. 좋을 땐 한 데 어울리다 험한 일을 피하면 부끄러울 것 같았다. 선언문 이후의 일은 아시는 대로다. 지목된 이가 버티고는 있지만, 우리에겐 어떤 불이익도 생기지 않았다. 이 사람들과는 무려 광화문에도 함께 나갔다. 지난주에는 깃발까지 들었다. 광장에서 같은 깃발 아래 촛불을 나눠 든 사람들은, 지금 당장 심정으로 가장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 선언은 내가 나온 대학의 동문들이 돌린 거였다. 이미 촛불의 기세가 현재의 권력보다 더 커진 시점이었다. 졸업한 지 15년이나 지난 데다, 동문회 같은 델 나가지 않아선지 특별한 감동은 없었다. 요컨대 거기에는 이름은 있었지만 사람이 없었던 게다.


세 번째 선언은 바로 지난주, '사회혁신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스타트업·비정부기구(NGO)·비영리조직(NPO) 동네 사람들과 함께 쓴 거였다. SNS에 누군가 동을 떠서 회의장소에 가보니,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 중 얼굴을 아는 이는 딱 둘 뿐이었다. 이미 선언만 하기에는 시일이 많이 흐른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어떤 얘기를 할 수 있는지 처음엔 약간 삐딱한 호기심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미처 정의조차 내려지지 않은 ‘첨단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왜 이런 ‘뒷북’을 치려 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회의방식이 독특했다. 모인 이들은 먼저 자기 자신과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하고, 포스트잇에 각자 이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고, 저마다 생각하는 해결방법을 썼다. 그리곤 앞에 나가 화이트보드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토론을 했다. "그래서 당신이 이루고픈 세상이 뭐냐"는 질문 앞에, 필자는 거의 울 지경이 됐다. 신이 그렇게 물으시면,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외칠 거라던 김구 선생 같은 심정이었을 게다. "네, 저는 성별과 성적지향과 부와 배움과 미추와 장애여부와 종교와 취향과 그 밖의 어떤 것으로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꿈꿉니다." 선언문 작성팀이 되겠다고 자원을 했다. 단지 멋진 문장을 쓰는 일이 아니라 그 질문의 답을 찾는 데, 완전히 사로잡혀버린 거다.


선언문을 쓰는 방식마저 독특했다. 우리는 구글 문서와 ‘빠띠’라는 새로운 정치 플랫폼을 썼다. 초안을 만들겠다고 자원한 6명 중 누군가 방대한 오프라인 회의결과를 요약하고, 누군가 그걸 토대로 뼈대글을 썼다. 다른 이들이 수시로 메모를 남기면, 편집을 맡은 누군가가 글을 가다듬었다. 초안을 공개한 뒤에도 계속 메모를 받았다. 온라인 선언문 아래로 개인의 한 줄 다짐 같은 걸 적게 했다. 그걸 또 모아서 반영했다. 온라인 토론에 참여한 이들이 180여명, 연설문에 의견을 남긴 이들이 스무 명 가까이 됐다. 팀은 이걸 ‘크라우드 소싱’ 방식이라고 불렀다.


이 모든 과정은 온라인으로 투명하게 공개됐고, 선언 이후 오프라인 모임이 전국으로 조직됐다. 그게 다 자발적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누군가는 공보팀을 만들어 언론에 알렸고, 누군가는 선언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타임랩스를 만들었다. 기술이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뼈대글을 쓴 이원재 여시재 이사의 말처럼, 여기 참여한 540여명은 모두 자기 고유의 다짐, 스스로 선택한 정치를 하는 셈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바로 곁에 다가온 새로운 미래를 봤다. N개의 시국선언과 N개의 깃발이 날리는, N사람의 꿈이 이뤄지는 세상이었다.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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