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유진 기자] "잘못하면 화물이 볼모로 잡힐 수 있어. 빨리 회수해!"
한진해운의 법정관리가 현실화된 어제(8월31일) 한국제지 직원들은 비상이 걸렸다. 한진해운 선박으로 수출하려던 물량을 회수해오라는 특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부랴부랴 부산항 등으로 내달려 선적을 기다리던 수출물량들을 회수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도공지와 펄프 등의 지류를 생산하는 한국제지는 전체 매출의 30%를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그동안은 수출물량 수송을 한진해운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다. 한국제지 관계자는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로 채권자들이 선박억류 등 실력행사에 나서면 우리 물건들이 볼모로 잡힐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섰다"며 "선박에 실린 화물 등을 회수하는 작업으로 직원들이 어제 온종일 진땀을 빼야 했다"고 토로했다.
한진해운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우려했던 '화물 엑소더스'가 현실이 됐다. 부산신항 한진해운 사무실에도 물건 회수를 문의하는 화주들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한진해운 선박을 통해 수출하려는 물량을 회수하는가 하면 다른 운송방안을 모색하느라 기업들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눈앞에 닥친 운송 차질을 막기 위해 대체 선박을 수소문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백색가전의 20% 가량을 한진해운 선박을 통해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한진해운과의 계약을 취소할 것인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대체 물량의 9%를 한진해운에 의존하고 있는 동부대우전자도 한진해운을 대체할 수 있는 선사와 선박 확보에 나섰다.
포스코는 물류대란 현실화에 따른 보고서를 내부적으로 작성하며 위기 대응에 나섰다. 문제가 되는 컨테이너선이 아닌 벌크선을 통해 철강 원자재를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타격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면서도 운임인상 등을 중심으로 한 대응책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한진해운이 퇴출될 경우 운임 상승으로 제품의 가격 경쟁력에 압박을 받게 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다.
채권자들이 컨테이너 선박을 가압류할 경우 압류가 해지될 때까지 선박의 부두접안이나 하역작업이 불가능해진다. 국내 1위 세계 8위 해운사인 한진해운은 국내 수출입 물량의 20%를 도맡아왔다.
정부는 예상되는 해운ㆍ항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기 비상 수송대책 등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하겠다는 계획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체선박 투입으로 수송 혼란을 해소하고, 선원들이 해외에서 억류되지 않도록 지원하는 한편, 환적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프라 개선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화물 엑소더스에 따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우려다. 화주들이 대체선박 확보와 화물 배송 지연에 따라 한진해운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나설 경우 소송가액은 최대 15조722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가운데 부산신항에서는 컨테이너를 고박하는 일을 맡은 래싱 업체들이 작업을 거부하면서 진통이 커지고 있다. 그 바람에 한진해운 선박이 부산신항 컨테이너 터미널에 입항하지 못해 화물수송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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