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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구멍 두개로 버텨온 '인류 3천년 비상식량'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31초

끊이지 않는 '군납 건빵 비리'…너희가 이 성스러운 음식을 아느냐

콧구멍 두개로 버텨온 '인류 3천년 비상식량' 사진 = 이건용 <건빵먹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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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건빵을 먹는다. 마실 거리도 없어 목메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이 손목에 막대를 댄다. 그가 건빵을 먹을 때마다 막대는 길어져서 팔꿈치, 겨드랑이를 지나 가슴까지 닿는다. 건빵을 먹을수록 건빵 먹기가 어려워지는 이 독특한 상황은 1975년 미술가 이건용이 선보인 행위예술 <건빵 먹기>의 실연(實演)을 통해 첫선을 보였는데, 건빵을 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기념비적 퍼포먼스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 몸이 갖는 일상적 기능이 건빵을 먹을 때마다 휘발되면서 점차 신체를 압제하는 세계로 다가오는 풍경은 건빵의 퍽퍽한 식감과 고통스러운 신체만큼이나 진중한 메시지를 시사했다.

콧구멍 두개로 버텨온 '인류 3천년 비상식량' 건빵은 장병을 대상으로 군부대에서 널리 보급되고 있는 비상식량이다.


주머니 속 건빵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전국 각지의 국군장병에게 연이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만큼이나 부실한 건빵은 직접적 위협이다. 과거 건빵에 별첨된 별사탕이 정력감퇴제라는 괴담이 떠돌았는가 하면, 해를 거듭할수록 건빵의 밀가루 배합이 변해 맛이 달라진다는 추측이 난무했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바지춤의 건빵주머니에서 한두 개씩 꺼내 입에 물었을 때 사회에선 몰랐던 심심함 속 맛의 경지를 깨달았다는 간증(?)과 함께 취사병에게 잘 부탁해 부대로 보급 나온 건빵을 식단에 튀김 반찬이 있는 날 남은 기름에 사정없이 튀겨 설탕에 버무린 튀김 건빵을 영접했을 때의 감동을 사병의 입을 통해 전해 듣자면 건빵이 병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다.


콧구멍 두개로 버텨온 '인류 3천년 비상식량' 사진 = 게티이미지


건빵 맛이 달라졌지 말입니다


지난 3월 15일 법무부는 군용 건빵 납품업체 선정 과정에서 담합 정황이 포착된 4개 업체에 2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기존의 군용 건빵 납품 시장을 독점해온 대명종합식품에 나머지 3개 업체가 납품물량을 나눠주지 않으면 기존 납품가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입찰하겠다며 접촉, 4개사가 담합해 입찰 단가를 높여 2억 원 이상의 부당이익을 취한 것으로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결과 밝혀졌다. 그렇다면 입찰단가가 높아진 2011년, 2012년의 군납 건빵은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해 한층 업그레이드됐을까? 2011년 8월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입찰 담합으로 납품단가를 부풀리고 방위사업청 공무원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10개 업체를 적발했다. 이 중 건빵납품업체 A사의 경우 2009년부터 2년간 저가 밀가루의 혼합비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부실 건빵 1,223만 봉지를 제조, 납품한 정황이 추가로 밝혀졌다. 맛이 달라진다는 사병들의 예리한 지적이 틀린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콧구멍 두개로 버텨온 '인류 3천년 비상식량' 건빵의 원형이 된 쉽비스킷, 사진 = 영국 국립 해양 박물관


군대와 건빵


군에서 보급으로 나오는 건빵이 아닌 이상에야 평소 건빵을 자주 먹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 건빵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전시(戰時) 장거리 이동에 보관과 배급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고, 건빵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신석기 시대의 빵에 이르며 처음으로 문헌에 남은 기록은 이집트에서 나왔다. 해양민족과 싸우던 람세스 2세 시대, 이집트 선원의 식량으로 보급된 Dhourra cake는 딱딱하나 부서지기 쉬운 납작한 빵의 형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로마 시대로 넘어오면서 전투식량으로 빠르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Panis biscoctus’가 도입, 그 레시피가 당대의 요리책 아피키우스에 기록되었는데 수분을 최소화하고 두 번 굽는 방식은 오늘날의 건빵제조방식과 매우 흡사해 건빵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콧구멍 두개로 버텨온 '인류 3천년 비상식량' 건빵의 구멍은 왜 두 개일까?


구멍은 왜 두 개?


그렇다면 현재 구멍이 두 개 뚫린 건빵의 모양은 언제 자리 잡게 된 것일까? 밀이 주식인 서양과 달리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양은 군용 식량으로 고초를 겪는 일이 잦았다. 이에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군용 식량인 ‘효료(兵糧)’ 빵이 처음 만들어졌고, 이후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밀가루와 쌀가루에 계란을 배합해 맥주 이스트로 발효시킨 빵, ‘갑면포(甲麵?)’가 개발되었다. 보존과 휴대의 편리성을 위해 비스킷 모양으로 만들되 가마에서 터지지 않게끔 공기구멍을 두 개 내어 구운 것이 현재 건빵 모양의 시초인데, 갑면포의 굽는 방식은 비스킷과 같으나 발상은 빵에서 왔다 하여 마른 빵이란 의미의 건(乾)을 붙여 간팡( 乾パン)이라 부르던 것이 ‘건빵’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콧구멍 두개로 버텨온 '인류 3천년 비상식량' 영화 '전함 포템킨'에 등장하는 썩은 고기 씬, 수병들의 반란을 촉발하는 원인이 된다.


부실 건빵과 썩은 고기


제정러시아 말기, 혼탁한 사회상황과 부패한 권력자들의 횡포로 사회적 불만이 높아지던 시점에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평화적 시위에 나선 노동자를 향해 차르의 군대가 발포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성난 군중의 폭동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당시 열악한 환경의 함선에서 복무 중인 해군에 구더기가 끓는 썩은 고기가 배식 되자 이에 항의한 수병들의 봉기가 단초가 되어 포템킨 호 반란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군납비리가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군인들의 식탁은 포템킨 호 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먹을 수 없게 썩어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부실 건빵 제조사인 A사는 지난 2012년 군용 건방 납품업체로 재선정된다. 방위사업청은 부정업체의 명단을 공개하고 최대 24개월까지 입찰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부실 업체는 행정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입찰에 다시 참여는 꼼수를 부려 제재를 피해갔다. 2012년 건빵 납품업체로 재선정된 A사는 이후 2014년 계약을 마지막으로 건빵제조를 중단하고 업종을 변경했으며, 담합에 참여한 B, C사가 A사의 공백을 차지해 지난 2014년, 2015년에 군용 건빵 납품 4개 지역의 계약업체로 나란히 선정됐다. 이 밖에도 썩은 햄버거빵 납품을 묵인하고 업체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현역 중령이 불구속 입건됐는가 하면 군용 햄버거 패티 납품업체가 국방규격과 다르게 닭고기를 섞어 납품한 사실이 감사원에 적발, 6개월간 입찰참가자격 제한 처분을 받았으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뒤 방사청이 주관한 김치와 어묵 군납입찰에 참가해 계약업체로 선정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네가 비싸도 좋으니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싸구려라도 좋으니 가짜가 아니기를 바란다.” - 정유희의 시, ‘함부로 애틋하게’ 중에서


과거 유럽 해군들 사이에서 건빵은 ‘어두운 곳에서 먹는 것’으로 불렸다. 배 안에서 허술하게 보관되던 건빵에 바구미가 들어가 빵을 갉아먹고, 그 안에 알을 까서 애벌레가 득실대는 통에 눈으로 보고는 먹을 수가 없어 붙은 웃픈 별칭이다. 우리 군에 납품되고 있는 건빵에도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득시글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전이 아닌 휴전국가에서 비단 건빵과 같은 먹거리뿐만 아니라 첨단 무기까지 군납비리의 거미줄이 드리워진 건 군 고위층의 도덕 불감증에 대한 선명한 거울이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고도 모택동의 공산당에 패해 도망쳐야 했던 장개석 군대의 패인이 군납비리를 위시한 수뇌부의 도덕적 해이였음을 잊어버린 것일까. 전방 군인들의 건빵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군대에서 국가안보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볼 때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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