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력 의미하는 수치, 모호한 기준탓에 자취 감춰
노스페이스, 블랙야크, 밀레 등 브랜드들 "충전재 원산지나 중량 강조"
[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 고등학교 2학년인 A군은 추워진 날씨에 두꺼운 구스다운 패딩점퍼를 꺼내입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 구매한 것으로, 소매 끝단에 표기된 숫자가 높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말에 고른 필파워 '800'의 최고가 라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근들어 출시되는 제품에는 숫자가 보이지 않는다. A군은 '괜히 부모님을 졸라 무리하게 비싼것을 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가 구스다운 패딩 재킷의 '계급장'처럼 여겨졌던 소매 끝단의 숫자가 사라지고 있다. 가격과 비례해 숫자가 높을 수록 좋은 제품으로 평가받던 '필파워' 표기가 사실상 객관적인 측정 방식이나 기준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노스페이스, 밀레, 블랙야크 등 업계 상위 아웃도어 브랜드들은 지난해부터 구스다운 제품 외피에 '필파워'를 의미하는 수치를 표기하지 않고있다. 필파워란 '옷 안감 속에 채워진 솜털의 복원력'을 뜻하는 것으로, 흔히 아웃도어 제품의 어깨나 소매께 700, 800 등 숫자로 표기돼 왔다.
필파워 수치가 높을수록 압축 보관했다가 다시 꺼내 입거나 세탁 후 원래 모양으로 회복하는 속도가 빠르다. 숫자와 비례해 대체적으로 제품의 가격이 비싸고, 600 이상을 고급 제품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아웃도어가 급성장했던 2013년까지 각 업체가 마케팅에 전면 활용했던 '필파워' 표기는 지난해부터 자취를 감추는 추세다. 각 업체가 필파워를 측정하는 기준, 방식, 환경이 제각각인 탓에 해당 수치가 무의미하다는 안팎의 지적이 잇따르면서다. 업체들은 개별적으로 1온스(28g)의 솜털을 실린더에 넣어 24시간 압축한 뒤 압축을 풀었을 때 부풀어오르는 정도를 측정해 표기하는데, 결과치가 당시의 습도나 대기상황, 온도 등에 큰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소비자단체는 물론이고 아웃도어 관련 동호회에서 자체조사를 통해 측정했을 때 해당 수치가 일치하지 않아 꾸준히 문제가 제기돼왔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각 기업에서 개별적으로 실시하는 필파워 측정 실험이 동일하게 진행될 수 없다는 한계에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 "그간 업체들이 필파워를 가격과 직결시켜왔기 때문에 그만큼 뒷말이 많았던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은 '몇 미터 고도의 산을 오를 때 좋은 제품', '몇 그람(g)의 털을 충전한 제품' 등 우회적으로 품질을 설명하고 있다"면서 "거위나 오리털의 원산지를 강조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한 때 청소년들의 '등골 브레이커'로 불리던 고가의 구스다운 재킷이 필파워 숫자로 이른바 '계급화'돼 논란을 일으킨 점을 의식한 조치라는 평가도 나온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필파워를 기준으로 제품의 등급(가격)을 선별해 논란이 된 바 있다"면서 "관계기관의 가이드라인이나 권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브랜드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변화를 꾀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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