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축구팬들 사이에는 '극장'이란 비유가 있다. 마치 각본을 짜놓은 드라마 같은 승리를 연출한 팀이나 경기에 붙여주는 일종의 찬사다. 그렇다면 올 시즌 K리그 클래식 최대 흥행작은? 바로 '서울 극장'이다.
2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FC서울은 베이징 궈안(중국)을 맞아 3-1로 승리했다. 전반 9분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후반 아디-윤일록-고명진의 연속골에 힘입어 극적으로 8강 진출권을 따냈다.
기막힌 기승전결에 반전까지 더해졌다. 서울은 앞선 1차전 원정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2차전 홈경기에서 비기더라도 골을 허용하면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16강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 이른 시간 수비 실수로 선제골까지 헌납했다. 순식간에 두 골 이상을 넣고 승리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린 것. 부담과 압박감은 선수단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탓에 실점 이후 일방적 공세를 퍼붓고도 좀처럼 만회골을 넣지 못했다. 골문 앞 마지막 패스나 슈팅은 정확도가 떨어진 건 그 때문이었다.
후반 15분, 마침내 절호의 득점기회가 찾아왔다. 페널티 지역에서 돌파를 시도하던 몰리나가 상대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키커는 간판 공격수 데얀. 강심장과 기술을 모두 갖춘 선수만이 가능한 '파넨카킥'까지 종종 구사하는 그였다. 득점은 당연한 귀결일 듯했다. 하지만 데얀의 발을 떠난 공은 야속하게도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왔다. '골대를 맞추는 팀은 패배한다'란 징크스는 마치 복선처럼 느껴졌다.
서울이 준비한 반전 드라마의 전개 속도는 꽤 빨랐다. 불과 1분 뒤 아디의 동점골이 폭발했다. 윤일록이 왼쪽 측면에서 올린 크로스가 상대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에서 뒤엉켰고, 아디는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 같이 재빠르게 공을 잡아 골문에 밀어 넣었다. 코너 플래그를 향한 복싱 세리머니는 덤이었다.
이때부터 '서울 극장'의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절정에 치달았다. 한 골을 더 넣으려는 서울과 어떻게든 막으려는 베이징의 공방전은 불을 뿜었다. 가슴 철렁한 장면도 나왔다. 후반 20분 베이징 공격수가 찬 슈팅이 김용대 골키퍼를 맞고 골문으로 흘러들어가려는 찰라, 뒤늦게 달려든 김진규가 공을 골라인 바로 앞에서 걷어냈다. 저절로 큰 한숨이 새어나왔다.
극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향하던 바로 그 때, 주인공이 마침내 사고를 친다. 동점골을 도왔던 윤일록이 후반 25분 페널티 지역 정면에서 벼락같은 오른발 슈팅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골망이 찢어질 듯 강력한 슈팅은 어지간한 특수효과로는 흉내도 못 낼 강렬함 자체였다. 이번 대회 중국 클럽과의 세 경기에서만 4골을 뽑아낸 '중국 킬러'다웠다.
이후 20여분은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관객들의 숨 쉴 틈조차 거부했다. 서울은 추가골을 넣기 위해 더더욱 공세의 끈을 당겼고, 베이징은 그 틈을 노린 역습으로 동점골을 노렸다. 몸을 사리지 않는 두 팀 선수들의 몸짓은 무대 위 온도를 높였다. 반전에 반전도 이어졌다. 후반 34분 베이징 공격수 카누테가 경고 누적 퇴장을 당하더니, 후반 41분엔 아디 역시 경고 누적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도무지 결말을 알 수 없었다.
스릴러가 가미된 액션 블록버스터는 마지막을 희극으로 장식했다. 경기 종료 직전 서울 역습 상황에서 베이징 골키퍼는 성급하게 골문을 비운 채 코너 플래그 근처까지 뛰쳐나왔다. 고요한은 속임수 동작으로 골키퍼를 이리저리 허둥대게 한 뒤 하대성에게 공을 넘겼고, 이어진 크로스를 받은 고명진이 침착한 왼발 슈팅으로 비어있는 골문 구석을 정확히 갈랐다. '극장'을 완성시키는 골이었다.
서울은 올 시즌 유독 극적인 역전승이 많았다. 4월 28일 강원전에선 0-2로 뒤지던 후반 34분부터 8분 동안 내리 세 골을 터뜨리며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지난 11일 대전전에선 후반 추가시간에 하대성의 결승골로 2-1 승리를 따냈다. 연이은 극장 연출로 서울은 ACL우승 트로피에 한 걸음 다가섰고, 초반 '흥행부진'을 겪었던 K리그 클래식에서도 상위권 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척척 내놓는 비결은 무엇일까. 최용수 서울 감독은 "우리 선수들은 스타 기질이 다분하다"라며 웃어 보인 뒤 "홈팬들의 뜨거운 열정과 응원도 선수들에게 묘한 힘을 불어넣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만의 경기를 펼치는 영리함도 생긴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선수들은 자신감이라 얘기한다. 고명진은 "이게 바로 FC서울만의 저력"이라며 "나 뿐만 아니라 동료들 모두 경기 내내 한순간도 우리가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라고 얘기했다. 더불어 "K리그 클래식을 대표하는 디펜딩 챔피언이란 자존심도 한몫했다"라고 덧붙였다. 윤일록 역시 "지는 상황에서도 좋은 기회가 반복되는 걸 보며 뒤집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라며 "8강 이후 어느 팀을 만나더라도 자신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 극장'의 2013시즌 흥행러시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전성호 기자 spree8@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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