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의 첫 유조선 건조기 - (4)
날씨 안 좋아 하루 넘긴 2월 15일 새벽 1시에 진수
불도저로 끌어내다 균형 잃자 수천명 직원이 밧줄 잡아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1호선의 도크 안 작업은 예정대로 1974년 2월초에 마무리되어 2월 15일 진수식을 치렀다.
당일 오전이면 배가 도크 밖으로 빠져나와야 했으나 14일까지 도크 밖 바다 속은 준설도 안돼 있었다. 그대로 도크 밖으로 나왔다가는 밑바닥이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좌초라도 하는 날에는 국제적 망신도 망신이거니와 회사의 앞날도 어두웠다.
밤을 새워 준설작업이 진행됐다. 바다 속을 훑어내는 일은 포항의 신항 준설공사를 끝내고 울산에 도착한 준설선 현대 2호가 맡았다. 결국 배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바다 밑을 다듬을 수 있었다.
진수식 당시 국내에는 26만t급 대형선박을 운전할 수 있는 선장이 없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큰 배가 우리나라 해안에 닿아본 적이 없었다. 1호선을 도크에서 바다로 끌어내는 단 한번의 작업을 위해 외국에서 선장을 초빙했다.
문제는 또 생겼다. 초빙해온 선장이 엔진을 시동하기 전에 배를 옮기면 위험하다고 작업을 거부했다. 큰 배가 빠져나가기에는 도크의 폭과 방파제 입구가 좁아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우리나라 항만청도 엔진시동 전에 배를 움직인다는 것은 항해규칙에 위반된다며 배를 띄우는데 반대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1호선을 도크로부터 하루바삐 내보내야 했다. 1973년 상반기부터 대형 유조선 주문이 쇄도해 도크 안을 비워야 후속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배를 만들어 선주에게 인도하기 전까지는 완전한 배가 아니다. 때문에 제조공정에는 항해규칙이 적용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 직접 1호선 진수를 지휘했다.
2월 15일 새벽 1시경 정 회장을 비롯한 전 사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식이 치러졌다. 원래는 전날 진수할 예정이었으나 일기가 불순해 하루를 늦췄다. 새벽 1시경이 되자 세차게 불던 바람도 그쳤다. 길이 345m, 폭 52m, 높이 27m. 배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절벽이었다. 도크 문이 열리고 물이 가득 차자 배는 떠올랐다. 선박을 도크에서 끌어내어 안벽에 붙여야 할 대공사가 남았다.
예인선을 쓰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나마도 없어서 도크 양측에 4대의 불도저를 붙여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4대의 불도저 간에 선장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관성이 큰 물체이기 때문에 한 번 쏠리면 복구시키기 어렵다. 배가 좌우안벽에 부딪히고 떨어지고 하니 선장이 조선하기 불가능해졌다.
결국 불도저만으로는 견제가 되지 않아 정 회장 이하 전 간부 및 구경하던 사람들이 로프를 잡고 힘으로 이동을 시켜야 했다. 조선을 또한 경험산업이라고 했는데 무경험에서 오는 대가를 치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결과는 여러 시간 만에 사고 없이 정해진 위치로 이동해 1호선 진수가 완료됐다.
선박 건조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사보에 올린 현장수기에서 이날의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2월 15일, 이제 세 시간만 있으면 진수다. 마치 결혼식 날짜를 정하고 기다리는 새색시 마음같이 초조하고 설레인다. 수정작업에 사용하던 장비를 도크 주변으로 옮겨놓고 도크 문이 올라가기만 기다렸다. 탱크검사를 지시받은 나는 지브크레인을 이용해 승선한 뒤, 우측 탱크 속에 들어가 검사를 시작했다. 얼마후 선저까지 물이 올라온건지 ‘윙’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나는 무의식중에 손바닥을 선저에 대보았다. 순간 손이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렸고,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아, 뜨는 것인가.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몸의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배가 떴다!’ 나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마침내 진수가 이루어진 것이다.”(‘현대조선사보’, 1974년 6월 10일)
2호선 이동은 더욱 힘들었다. 1호선은 서쪽 도크에서 건조, 진수해 서쪽 안벽에 붙였으니 이동거리가 없었으나 2호선은 동쪽 도크에서 건조해 서쪽 안벽에 붙여 의장공사를 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동쪽에는 안벽 크레인이 없었고 의장공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영빈관 쪽을 우회해서 먼 거리를 이동시켜야 하는 큰 작업이었다.
도크 마스터인 선장이 타고 많은 간부들이 협조 승선했다. 도크에서 좁은 방파제를 빠져나와야 했고, 서쪽 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방파제를 한 번 더 통과해서 입항해야 했다. 물론 선장도 이 같은 대형 선박은 조선 경험이 없고 기관이 없기 때문에 예인선에 의존했으나, 공선이기 때문에 해상으로 23m 이상 노출된 바람에 극히 민감했다. 예인선에 힘이 없으면 좌초되는 운명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 건조한 선박인데.
예인선은 울산 조선소에서 보유하고 있던 2척과, 작은 마력이지만 포항 항만청에서 2척을 임대해 사용했다. 하지만 이동통신도 성능이 불량하고 항만청 선원이 공무원인지라 선장 지시에 잘 따르지 않았다. 선폭이 26m이고 길이가 340m 정도였으니 선교에 서면 선수에 가려서 방파제 끝이 보이지 않았다. 1등항해사가 선수에 서서 일일이 선장에게 보고하면 이에 따라 예인선에 지시가 간다. 바람은 잔잔했지만 거대한 선체는 흐르고 선수는 방파제로 나오고 있으나 선체는 아직 항내에 있다. 밖에는 해류가 2노트 정도로 흐른다. 선수가 흐르니 중심선을 유지하기 힘들고 선장은 땀이 비오듯 했다. 고함을 계속 치니 목이 메어 마치 아이 낳는 산모의 진통을 보는 것 같았다. 결국 위기일발로 빠져나왔다. 좌초돼 천연기념물이 되는 것을 겨우 모면했다. 선박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곡예를 하는 기분이었다.
수천명의 땀과 피로 불철주야 산고 끝에 겨우 만들어진 결정체였지만 엔진은 죽어 있고 바람은 불고 해류는 흐르고 터그보트는 생각과 달리 움직여주지 않고···. 선장은 정말 십년 감수한 기분이었지만 임대한 예인선은 기관에 무리가 갈까봐 전력운전을 해주지 않았다.
서쪽 만 입구에 도착해서 만내에 들어가야 할 때가 됐다. 만내는 좁고 배는 크기 때문에 배 1척이 항구를 꽉 메운 기분이다. 방파제 입구가 좁으니 중심에 배를 맞추고 짧은 시간에 통과해야 하는데 예선이 전력을 내주지 않으니 배가 바람, 조류에 따라 흘러가고 옆에는 방파제의 테트라포드나 암석이 있어 대단히 위험했다.
선수가 통과하기 전에 배는 남쪽 방파제 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나 남쪽에 있는 포항에서 온 예선은 자기 배가 위험하니 선장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들만 빠져나오고 말았다. 4만t의 선박이 무서운 타력으로 밀려들어와서 꽝하는 소리와 함께 방파제에 부딪혔으나 그 반력에 의해서 선미가 서쪽으로 돌며 통과했다. 통과하고 나니 바로 안벽에 선수가 충돌하는 기분이고 겨우 접안에 성공했다. 선장의 작업복은 온통 땀에 절어 있었고 얼굴은 사색이 돼 있었다. 짧은 거리인데도 약 4시간에 걸친 항해였다.
도착하니 여직원이 선장에게 꽃다발을 증정했다. 조선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광경이었을 것이다.
<자료: 현대중공업>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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