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실 설계’ 머리는 선수, 다리는 선미로 설계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상선에 탑승한 선원들은 대개 열흘에서 한 달 이상 파도와 싸우며 항해한다.
따라서 선원들이 생활하는 ‘선실’(船室·Deck House)은 선박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그렇다면 선원들이 거주하는 선실내 침대의 방향은 어느 쪽으로 놓이는 것일까? 정답은 거의 예외없이 머리가 선수(船首), 다리가 선미(船尾)로 설계된다.
이유가 있다. 승합차나 열차에 탔을 때 진행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놓인 좌석에 앉을 경우 차 멀미나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박도 이와 마찬가지다.
배는 파도에 의해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Rolling)’과 앞뒤로 흔들리는 ‘피칭(Pitching)’이 수시로 발생하며, 심할 땐 이러한 흔들림이 3~5일간 지속되기도 한다. 특히 앞뒤로 길쭉하게 생긴 배 모양의 특성 때문에 앞뒤 흔들림(피칭)보다 좌우 흔들림(롤링)이 더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원들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덜 받도록 하기 위해 선실 침대는 ‘배의 진행방향’으로 두는 게 상식이다. 또한 병실 침대처럼 머리맡을 발쪽보다 조금 높게 설계한다.
◆편리함과 아름다움 반영= 선실은 다른 선체의 일부분을 제작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블록이 작업의 종류에 따라 철저히 분화한 조직과 인원으로 공정이 진행되는 반면, 선실은 전담부서에서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현대미포조선은 선실설계부와 선실 의장부에서 설계와 생산을 전담한다. 이는 선박 건조 대부분의 공정이 기능과 생산성에 중점을 두지만, 선실은 선원들의 생활과 관련된 활용의 편의성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선실설계부는 선실의 구조에서 기장·선장·전장, 배관 등 전 분야를 선실 설계부 내에서 통합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소속 직원들은 여러 분야를 통합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선실 설계 직원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편리함’과 ‘아름다움’이다. 선원들의 동선을 고려해 공간을 배치하고 긴 항해 생활 속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색감의 패턴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써야 한다. 더구나 선실이라는 곳은 선박이 운항할 항로 및 기후적 특성, 선원들의 취향과 문화 등에 따라 각 층(Deck)별 구획 설정과 의장 사양 등의 설계와 인테리어가 달라진다. 따라서 선실 설계 직원들은 실제 선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한다.
◆칠성급 호텔을 짓는 마음으로= 건조중인 상선에 선실이 탑재되면 이를 선체에 고정시키는 취부작업이 이어진다. 이때부터 선실 의장담당 직원들의 일이 시작된다. 오직 철판으로만 이뤄진 거주구 내에 배관, 전선 등을 거미줄처럼 설치하고 각종 외벽 작업을 마무리 한 뒤 침대, 옷장, 책상, 에어컨이나 배관, 전선 등을 거미줄처럼 설치하고 각종 외벽작업을 마무리 한다.
이어 침대, 옷장, 책상, 그리고 에어컨이나 세탁기 등 선원들의 생활에 필요한 가구와 장비들도 거주구 내에 배치한다. 또 선실에는 선박의 수송물을 선적시키거나 하역시킬 수 있는 제어장비를 조정실(Cargo Control Room)에 설치한다. 이밖에 선박의 운항과 관련된 레이더, 방향계, 위성항법장치(GPS) 등 항해통신 장비들도 설치하는데, 워낙 고가의 장비이다 외벽에 단열재와 패널 등을 부착하고 바닥은 시멘트, 타일 등으로 덮는다.
조선업계는 이러한 선실 공사를 호텔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선원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전체 선박의 각 부분중에서도 선주측의 관심이 가장 높은 곳이라 사소한 작업 하나까지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가구 배치에서부터 마감공사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소홀할 수가 없다. 작업 후 미처 처리하지 못한 쓰레기 하나에 선박 전체에 대한 평가가 좌우될 수도 있다.
◆로열층도 있어요= 유조선, 컨테이너선 등의 승선인원이 대개 25~30명 선인데, 선실은 휴게실, 식당, 육관, 병원 등을 포함해 35~40여개 정도로 설계한다.
또한 선실은 선원의 계급에 따라 크기와 구조가 다 다르다. 선장과 기관장 선실은 21평 정도이며, 침실 외에 개인 집무실과 회의실이 주어진다. 특급호텔의 스위트룸에 버금가는 시설이다.
1등 항해사와 갑판장은 12평, 2~3등 항해사(기사)는 5평, 일반 선원들은 4평이다. 3등 항해사(기사)까지 집무실이 주어지고, 일반 선원들은 침실과 가구 등 기본적인 사양만 들어간다.
선실에는 일반 아파트처럼 로얄층이 존재한다. 맨 위층을 브릿지(Bridge)라고 부르며, 항해 콘트롤 룸이 위치하고, 바로 아래층에 선장과 기관장의 선실이 위치한다. 브릿지와 가깝고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고급사관(1등)-사관(2등~3등)-선원 순으로 선실을 배치한다. 1층은 기계실과 창고, 2층에는 식당, 휴게실, 체육시설 등 편의시설이 자리 잡는다.
현대미포조선에서 건조하는 3만7000t급 석유화학제품 운반선의 데크 하우스는 일반적으로 길이 24m, 너비 18m, 높이 22m 정도이며 무게는 대략 380~400t이다. 30명 남짓 되는 인원이 생활하게 될 이 공간은 5층짜리 아파트 1동의 규모와 맞먹으며 컨테이너선의 경우 이보다 2~3층 크기를 더한다고 보면 된다.
◆안전 규정 까다로워= 선실은 또한 안전 규정이 매우 까다롭다. 선실에 설치하는 대부분의 제품들은 불에 잘 붙지 않거나 연기를 적게 발생시키는 특수 소재로 만들어진다. 또 선박에는 비행기의 블랙박스와 같은 항해자료 기록장치(VDR)를 설치하도록 규정돼 있다.
9.11테러 이후 선박의 보안 요건도 까다로워졌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선박 및 항만시설보안과 관련된 규정인 ISPS 코드를 시행해 500t 이상 선박에는 통신 안전장치인 SSAS(Ship Security Alert System, 선박안전경보장치)와 AIS(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 선박자동식별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자료: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STX조선해양>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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