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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마지막 포옹

시계아이콘03분 07초 소요

일송(日松)은, 충청향우회중앙회 총재로 재임 중에 과로로 작고하신 김용래 선생(先生)의 아호입니다. 일생을 공인으로 사셨던 분의 유고집을 준비하며 들었던 이야기가 너무나 선연하기에, 금년 2월20일 오후에 평소와 달랐던 그분의 일상에 대해서 말해 보렵니다.


그날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취임 두 달여 되는 날로, 저녁에는 서울 강남구에서 구청장이 초청한 충청향우들의 친교모임에 참석키로 예정되어 있었답니다. 오전 조찬모임에 연이어 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학위 수여식 치사를 한 후 오찬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예상 밖의 질문을 받습니다.

“이사장님께서는 평생 주요한 공직을 맡으셨고, 물러나신 후에도 대학에서 강의를 하시며 15년 이상을 왕성하게 활동을 계속하시는데 특별한 비결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우리 후학들이 귀감으로 삼을 말씀 한 마디를 부탁드립니다”


“그 비결을 굳이 말하자면, 제가 오늘날까지 명예롭게 공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큰 힘은 아내로부터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내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 자리에 서서 지금과 같은 질문을 받을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이렇게 깨끗하게 설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짧지만 명백하게 아내의 내조를 언급하자 참석했던 모든 분들이 뜨거운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그날 따라 저녁 늦게까지 공식 행사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직접 연단에 서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었기에 이동시간을 감안하여 서둘러서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지요.


다음 행사까지 빈 약간의 시간을, 日松은 잠시 짬을 내서 집에 들려 가리라고 맘먹었답니다. 압구정동의 자택은 28년 전에 분양받은 이후부터 이사 한번 없이 그대로 살고 있는 보금자리로, 그날도 아내(전통 장류 명장)는 여느 때처럼 앞치마 차림으로 장을 끓이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거실로 나와 보니 뜻밖에도 평소보다 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들어서는 남편을 볼 수 있었지요. 살면서 출근을 한 후에 저녁일정을 앞두고 집에 들른 적이 없었음으로 의아해서 물어 보았답니다.


“아니, 이 시간에 어인 일로 들어오세요?”
日松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두 팔로 아내를 꼬옥 껴안으면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들어왔지···.”
대낮의 느닷없는 애정표현에 당황한 아내가 반사적으로 몸을 사렸겠지요.


“집에 도우미 아줌마도 있는데 새삼 왜 이러세요?”라며 몸을 빼내자,
“있으면 어때요. 우리가 뭐 젊은 애들인가요?”
마음껏 하지 못한 포옹이 겸연쩍어서 먼저 방으로 들어서며, 先生은 뒤따르던 아내를 향해 말을 이었습니다.


“사실은 말이오. 오늘 오찬자리에서 공직을 명예롭게 마칠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질문을 받았는데, 전적으로 당신의 내조덕분이었다고 말해서 많은 박수를 받았어요.”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듣게 된 아내는, 좀 전에 밀쳐낸 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일순간 가슴이 울컥하는 감정이 일어나 뒤에서 가만히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했답니다.


“부족한 저를 그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칭찬해 주시다니 몸 둘바를 모르겠네요. 정말 고마워요”라며 등에다 뺨을 대자, 말없이 아내의 맞잡은 손등을 토닥거려 주었다고 합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부부가 실로 오랜만에 알 수 없는 감회에 젖어 서로를 위무했던 뜨거운 포옹이었습니다.


그 후 안방의 작은 탁자에 앉아서 다음 행사의 연설을 구상하는지 잠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두유 한 잔을 다 마신 후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배웅한 뒷모습이 마지막 발걸음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녁 7시가 넘을 무렵, 행사장에서 연설을 마친 日松이 자리에 앉자마자 쓰러진 후 의식이 없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게 됩니다. 이내 아내가 차를 몰고 시립병원을 향해서 내달리며, 황망하지만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려야한다고 눈물을 훔치며 암시를 걸었답니다. 비상등을 켠 채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은 내내 경적을 누르면서 퇴근길의 강남거리에서 간절하게 빌고 또 애원했겠지요.


“지금 제가 당신 곁으로 가고 있답니다. 제발 도착할 때까지 떠나지 말고 꼭 기다려 주십사!”라고 수없이 되내이며, 천리길처럼 느껴지는 밤거리를 외롭게 질주합니다. 주위의 차들이 그 애절한 바람을 읽었는지 다들 썰물처럼 길을 열어주었지만, 日松은 그 시각 눈을 감고 혼자만의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움은 차선을 넘어서


그런데··· 비통한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쯤 지나서 집으로 날아온 9만원짜리 차선위반 범칙금 통지서 한 장을 받게 됩니다. 아내는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누르며 기사를 불러 연유를 물어본 즉, 울먹이며 하는 대답이 더욱 가슴을 때렸습니다.


그날 판교에서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들어선 경부고속도로가 막히자, “차선을 위반하더라도 빨리 집에 들렀다가 가야 한다”며 재촉을 해서 할 수없이 그랬다는 대답을 듣게 되지요. 생전에 그런 식의 위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건 아마도 곧 다가올 운명을 직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처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범칙금 딱지는, 차선을 위반해서라도 반드시 아내를 다시 보고 가야하겠다는 절절한 그리움의 징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서는 안 된다고 암시한 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날 낮의 포옹은 50년을 함께 산 부부로서 日松이 아내에게 해준 마지막 이벤트가 되고 말았지요.


평소에 쓰던 안경은 주말이면 할아버지 곁에 와서 잠들었던 장손(고3)이 가져가서 제 책상 위에 두었답니다. 할아버지 방을 치웠다며 못내 서운해 하더니, 할아버지 생각이 나면 퇴교 길에 들러 장롱속의 베갯잇을 꺼내 코를 박고 한참동안 체취를 맡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듭니다.
8살 손녀는 생전에 사용하던 할아버지 볼펜을 들고 추억처럼 사랑을 느끼고 생활한답니다.


주인 잃은 장마저 슬픔으로 몸부림 친 장독대


옛날부터, “大主가 떠나면 집안의 장이 뒤집힌다”는 말이 있었다지요.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日松의 장례가 치러진 다음 주에 장독 뚜껑을 열어보니, 무심한 간장은 아래 위가 뒤집어진 채 大主의 不在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답니다. 그걸 다시 달이면서 흘린 아내의 눈물이 오히려 간장보다 농도가 진했을 것입니다.


종갓집의 간장조차도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비좁은 장독 안에서 몸부림쳤다는 사실을, 과연 겨울에 떠난 그분이 알고나 계실까요? 오늘 아침에도 현관에 벗어 둔 日松의 구두 두 짝은 반질거리는 코로 예전처럼 주인의 따스한 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한 사람의 빈자리가 가족들에겐 애틋한 그리움으로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74년의 역동적인 공인의 삶!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홀연히 가신 듯합니다. 늦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저 낙엽들도 다들 한 시절이 아쉬워서 손짓을 하고 가는데···.

시사평론가 김대우 pdik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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